유머가 자존감을 구한 사례
실패했을 때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자존감이다.오늘은 실패를 농담으로 바꾸머 살아남은 방법을 이야기 하러 합니다. 일이 잘되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그 일을 해낸 ‘나’ 자체가 문제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그때부터 실패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나를 설명하는 단어가 된다.
나는 그런 순간들을 여러 번 겪었고, 그때마다 의외의 방식으로 버텼다. 성찰도, 반성도, 즉각적인 재도전도 아니었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실패를 농담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실패를 진지하게 대할수록 내가 사라지던 순간들
한동안 나는 실패를 지나치게 정직하게 마주하려 애썼다. 어디서 잘못됐는지 분석하고, 책임을 나에게서 찾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빠짐없이 적었다. 그 과정은 성숙해 보였지만, 동시에 나를 점점 말라가게 했다.
실패를 설명하는 문장 속에서, 나는 항상 부족한 사람으로 등장했다. 노력은 했지만 모자랐고, 의도는 좋았지만 결과는 미흡했다. 그 서사가 반복될수록 실패는 사건이 아니라 정체성처럼 달라붙었다.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내가 실패를 너무 진지하게 대하는 바람에, 실패보다 먼저 내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어떤 날은 실패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이 굳었고, 말수가 줄었으며,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축소했다. 실패를 ‘제대로’ 다루려던 태도가 오히려 나를 지워가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아주 사소한 시도를 했다. 실패에 대해 이야기할 때, 설명 대신 가벼운 농담 하나를 덧붙이는 것. 그 농담은 실패를 덮기 위한 위장이 아니라, 나를 보호하기 위한 완충 장치였다.
유머는 실패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나를 살려두었다
실패를 농담으로 바꾼다고 해서, 그 실패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상황은 그대로였고, 결과도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유머는 실패와 나 사이에 아주 작은 거리를 만들어주었다.
“이건 진짜 웃픈 케이스야.”
“내 인생의 레전드 흑역사 추가.”
이런 말들은 실패를 가볍게 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나 자신을 실패와 동일시하지 않기 위한 언어였다.
유머의 가장 큰 힘은, 실패를 이야기하는 주도권을 나에게 돌려준다는 데 있었다. 실패를 심각하게 설명할 때 나는 늘 평가받는 위치에 있었지만, 농담으로 말하는 순간 나는 그 상황을 재구성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실패를 비웃은 것이 아니라, 실패 앞에서도 나를 잃지 않겠다는 선택을 한 셈이었다.
특히 사람들 앞에서 유머는 자존감을 지켜주는 방패가 되었다. 실패를 숨기지 않되,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않는 방식. 나보다 먼저 내가 그 상황을 웃어넘기자, 실패는 더 이상 나를 공격하지 못했다.
유머는 회피가 아니었다. 오히려 실패를 직시할 수 있게 해준 정서적 안전장치였다.
농담으로 바꾼 실패가 남긴 것들
실패를 농담으로 말하기 시작한 이후, 나는 스스로에게 조금 더 관대해졌다. 실패를 겪어도 “이건 끝이다”가 아니라 “이런 일도 있지”라는 문장이 먼저 떠올랐다.
그 변화는 아주 작았지만, 자존감에는 결정적이었다. 실패가 나의 가치 전체를 설명하지 않는다는 감각, 그 감각이 유머를 통해 서서히 회복되었다.
물론 모든 실패를 농담으로 처리할 수는 없다. 어떤 실패는 충분히 아프고, 충분히 슬퍼해야 한다. 하지만 적어도, 나를 무너뜨릴 필요는 없었다. 유머는 실패의 무게를 줄이기보다, 그 무게를 견딜 수 있는 손잡이를 만들어주었다.
지금도 나는 실패 앞에서 종종 웃는다. 그 웃음은 가벼움이 아니라, 살아남았다는 증거에 가깝다. 실패를 겪고도 말할 수 있고, 웃을 수 있고, 다음 날을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
유머는 나를 강하게 만들지 않았다. 대신 부서지지 않게 해주었다.
실패를 농담으로 바꾸며 살아남았다는 말은, 실패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뜻이 아니다. 그건 실패 속에서도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고백에 가깝다.
그리고 그 방법은 지금도 여전히, 내가 나를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기술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