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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기록하지 않고 흘려보낸 경험

by think28148 2026. 1. 7.

모든 실패가 성장 자산일 필요는 없다는 것

우리는 실패를 겪으면 곧바로 기록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산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다음엔 어떻게 다르게 할지, 이 경험에서 어떤 교훈을 얻었는지를 정리해야만 그 실패가 ‘쓸모 있어진다’고 배웠다. 오늘은 실패를 기록하지 않고 흘려보낸 경험에 대해 이야기 해보러 합니다.

 

실패는 분석의 대상이 되고, 성찰의 재료가 되며, 결국 성장의 증거로 가공된다.
하지만 나는 어느 순간부터, 어떤 실패들은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은 채 흘려보내기로 했다. 그것은 게으름이나 회피가 아니라, 오히려 실패를 다루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선택이었다.

 

실패를 기록하지 않고 흘려보낸 경험
실패를 기록하지 않고 흘려보낸 경험

 

실패를 기록하지 않으면 남는 게 없을까

예전의 나는 실패를 지나치게 성실하게 기록하는 사람이었다. 잘 안 된 일 뒤에는 반드시 메모를 남겼고, 원인을 분석했고, 감정까지 빠짐없이 적어두려 했다. 그래야 이 실패가 헛되지 않다고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록이 쌓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실패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페이지마다 반복되는 반성, 다짐, 개선점들 속에서 나는 점점 실패를 곱씹는 사람이 되어갔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실패는 정말 기록할 가치가 있는 걸까?’
그 실패는 특별하지도 않았고, 인생의 방향을 바꿀 만큼 결정적이지도 않았다. 다만 기대했던 만큼 잘되지 않았고, 그 사실이 조금 실망스러웠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습관처럼 의미를 찾으려 했고, 그 과정에서 실패를 필요 이상으로 크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그 실패는 기록하지 않았다. 노트에 남기지 않았고, 교훈으로 정리하지도 않았다. 그냥 하루가 지나가듯 흘려보냈다. 놀랍게도, 그 실패는 생각보다 빨리 내 일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때 처음 깨달았다. 기록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실패를 자산으로 만들려는 강박에서 벗어날 때

“이 경험에서 배운 점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은 너무 익숙해서, 이제는 실패보다 먼저 떠오른다. 실패는 곧 배움으로 전환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미완성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 공식은 때때로 실패를 더 무겁게 만든다.
모든 실패를 성장 자산으로 만들려는 강박은, 실패 자체보다 그 이후의 태도를 더 피곤하게 한다.

나는 실패를 기록하지 않기로 한 이후, 오히려 실패가 가진 다양한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실패는 나의 부족함을 드러내지만, 어떤 실패는 단순히 타이밍이 맞지 않았을 뿐이다. 또 어떤 실패는 내가 진짜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역할만 하고 끝난다.
이런 실패들까지 모두 성장 서사로 엮으려 하면, 실패는 점점 제자리를 잃는다.

기록하지 않은 실패들은 나를 가르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사라졌다. 그 사라짐 속에는 묘한 안도감이 있었다. 실패를 계속 붙잡고 해석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 이 경험을 꼭 유의미하게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여유.
성장은 항상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로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나간 경험들이, 나중에 다른 선택을 할 때 자연스럽게 기준이 되기도 했다.

흘려보낸 실패가 남긴 조용한 변화

실패를 기록하지 않고 흘려보내기 시작하면서, 나의 태도에도 작은 변화가 생겼다. 가장 큰 변화는 실패를 대하는 속도였다. 예전에는 실패 후 바로 멈춰 서서 돌아봤다면, 이제는 한 박자 늦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실패가 정말 붙잡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그냥 지나가도 되는 일인지 구분하려 노력하게 된 것이다.

또 하나는, 나 자신에게 덜 엄격해졌다는 점이다. 실패를 자산으로 만들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자, 실패를 실패로 인정하는 일이 쉬워졌다. 잘 안 된 일은 잘 안 된 일로 끝내도 되었고, 거기서 아무런 교훈을 건지지 못해도 괜찮았다.
그 여백 덕분에, 나는 오히려 중요한 실패들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 기록해야 할 경험, 다시 들여다볼 가치가 있는 실패는 자연스럽게 남았다.

지금도 나는 종종 실패를 흘려보낸다. 메모하지 않고, 분석하지 않고, 의미를 만들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그 실패들은 내 삶에서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곧 무의미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모든 경험이 자산이 될 필요는 없다. 어떤 실패는 그저 지나가도 되는 사건으로 남아도 충분하다.

실패를 기록하지 않기로 한 선택은, 나를 덜 성장하게 만들지 않았다. 대신 나를 조금 더 편안하게 살아가게 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실패 앞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건 굳이 남기지 않아도 되는 경험이야.”

그 말 한마디가, 생각보다 큰 자유를 가져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