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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설득해 ‘지금은 쉬어도 괜찮다’고 말했다

by think28148 2026. 2. 24.

쉼에 대한 죄책감을 내려놓는 연습
오늘은 나는 나를 설득해 지금은 쉬어도 괜찮다고 말했다에 대해 이야기 하러 해

 

나는 나를 설득해 ‘지금은 쉬어도 괜찮다’고 말했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쉬지 못했는건가?  멈추면 사라질 것 같았던 나의 가치에 대하여

나는 오랫동안 “쉬고 싶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피곤하다는 말은 할 수 있었지만, 쉬겠다는 말은 어려웠다. 피곤은 상태였고, 쉼은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피곤은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것이지만, 쉼은 스스로 허락해야만 가능한 행위였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그 허락을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몸이 무겁고 머리가 흐릿해도, 감정이 예민해지고 집중이 흐트러져도 나는 늘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 정도는 아직 괜찮다.” “지금 멈추면 안 된다.” “조금만 더 하면 된다.” 그 문장들은 어느새 나의 기본값이 되었고, 나는 그 생각을 의심하지도 않았다. 마치 숨 쉬듯 자연스러웠다.

내가 쉬지 못했던 진짜 이유는 단순히 바빠서가 아니었다. 사실은 멈추는 순간 드러날 나의 상태가 두려웠다. 바쁠 때의 나는 그럴듯했다. 일정이 가득 차 있고 해야 할 일이 많으면 나는 나름의 명분을 갖게 된다. “나는 노력하고 있다.” “나는 뒤처지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그 말은 나를 지켜주는 방패였다. 누군가 나를 평가해도, 심지어 내가 나를 의심해도, 적어도 나는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를 내밀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정이 비는 순간, 할 일이 잠시 멈추는 순간, 나는 나와 마주해야 했다. 그때의 나는 그렇게 단단하지 않았다. 피로는 생각보다 깊었고, 감정은 예상보다 불안정했으며, 확신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계속 움직였다.

돌이켜보면 나는 바쁨을 일종의 마취제로 사용하고 있었다. 계속 움직이면 생각할 시간이 줄어든다. 계속 일하면 감정을 느낄 틈이 없다. 나는 그렇게 나를 덜어내고 있었다. 멈추면 올라올 감정들, 마주해야 할 의문들, 인정해야 할 한계를 보기 싫어서 일부러 소음을 만들었다. 일정이라는 소음, 목표라는 소음, 성과라는 소음으로 나를 둘러쌌다. 조용해지면 들릴 것 같은 내면의 목소리가 무서웠다. “너 지금 괜찮은 거 맞아?” “이 방향이 맞아?”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해?” 그 질문들은 바쁠 때는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계속 바쁜 상태를 유지하려 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비교였다. 세상은 항상 움직이고 있었고, 누군가는 늘 나보다 앞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누군가는 더 많은 성과를 냈고, 누군가는 더 빠르게 성장했으며, 누군가는 더 큰 결과를 만들어냈다. 나는 그 흐름 속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속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믿었다. 멈추는 것은 곧 뒤처지는 것이고, 뒤처지는 것은 곧 잊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쉬는 순간에도 마음은 쉬지 못했다. 휴식을 취하는 동안에도 나는 다른 사람들의 움직임을 상상했고, 그 상상은 곧 죄책감으로 이어졌다.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는 노력하고 있을 텐데.” 이 문장은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문제는 내가 나를 평가하는 기준이 지나치게 단선적이었다는 점이다. 나는 나의 가치를 오로지 ‘성과’로 환산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해냈을 때만 괜찮은 사람이었고, 눈에 보이는 결과를 만들었을 때만 의미 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 기준 속에서 쉼은 자연스럽게 ‘무가치한 시간’이 되었다.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않는 시간, 증명할 수 없는 시간, 보여줄 수 없는 시간. 나는 그런 시간을 두려워했다. 보이지 않으면 없는 것처럼 느껴졌고, 기록되지 않으면 사라질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하루를 끝낼 때마다 “오늘 무엇을 해냈는가”만을 물었다. 해낸 것이 많으면 안도했고, 적으면 자책했다. 이 단순한 구조 안에서 나는 점점 더 숨이 막혀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쉼을 밀어낸 삶은 점점 더 비효율적이 되어갔다. 충분히 자지 못한 날은 생각이 흐릿했고, 억지로 밀어붙인 작업은 깊이가 얕았으며,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 결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점점 지치고 있었지만, 지쳤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대신 더 강해져야 한다고 믿었다. 강한 사람은 쉬지 않는다고, 버티는 사람이 결국 이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나를 더 약하게 만들었다. 무리해서 달린 날의 다음 날은 더 무거웠고, 억지로 버틴 시간 뒤에는 더 큰 무기력이 찾아왔다. 나는 그 악순환 속에서 계속 스스로를 다그쳤다. “왜 이렇게 나약해?” “이 정도도 감당 못해?”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나는 정말로 성실한 사람일까, 아니면 단지 두려움을 피해 달리고 있는 사람일까. 이 질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한 번도 ‘왜 쉬지 못하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그래야 한다고 믿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믿음은 나를 점점 더 소모시키고 있었다. 나는 깨달았다. 내가 쉬지 못했던 이유는 목표가 많아서가 아니라, 멈추면 나의 가치가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성과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것 같았고, 바쁘지 않으면 존재 이유가 희미해질 것 같았다.

그 순간 처음으로 이런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성과가 아니라 존재로서 충분한가?” 이 질문 앞에서 나는 오래 멈춰 있었다. 만약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루를 보내도 여전히 괜찮은 사람이라면, 나는 굳이 이렇게까지 나를 몰아붙이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만약 내가 잠시 멈춰도 사라지지 않는 존재라면, 쉼은 패배가 아니라 선택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나를 설득해보기로 했다. “지금은 쉬어도 괜찮다.” 이 말은 나를 느슨하게 만들기 위한 변명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지키기 위한 선언에 가까웠다. 나는 기계가 아니라는 사실, 무한히 작동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 멈춤 없이 지속되는 삶은 결국 나를 망가뜨린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문장이었다. 그 문장을 입 밖으로 꺼내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수없이 망설였고, 여러 번 삼켰다. 하지만 결국 말해보았다. 그리고 그 말은 생각보다 큰 울림으로 내 안에 남았다.

쉬지 못했던 과거의 나는 강해 보이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진짜 강함은 멈출 줄 아는 용기에서 나오는 것 같다. 계속 달리는 것은 관성일 수 있지만, 스스로에게 “이제는 멈춰도 된다”고 말하는 일은 의식적인 선택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그 선택을 연습하고 있다. 여전히 완벽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멈추는 것을 패배로 해석하지는 않으려 한다.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쉬어도 존재한다. 그리고 그 단순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쉼에 대한 죄책감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 성과 중심 사고와 비교의 함정

내가 쉬지 못했던 진짜 이유는 단순히 성실해서도, 책임감이 강해서도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깊은 곳에서 작동하고 있던 사고방식 때문이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성과 중심’으로 나를 평가해왔다. 하루를 돌아볼 때 내가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감정이 아니라 결과였다. 오늘 무엇을 끝냈는지, 무엇을 해냈는지, 얼마나 생산적이었는지를 점검했다. 체크리스트에 표시할 수 있는 항목이 많을수록 안심했고, 아무것도 표시하지 못한 날에는 이유 없이 나 자신이 작아졌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존재’가 아니라 ‘결과’로 나를 정의하기 시작했다.

이 사고방식 속에서 쉼은 자연스럽게 부정적인 위치로 밀려났다. 쉼은 결과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숫자로 환산되지 않고,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는 산출물도 없다.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다. 성과 중심의 세계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은 없는 것과 비슷하게 취급된다. 그러니 쉼은 곧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되었고, 아무것도 하지 않음은 곧 ‘무가치함’으로 연결되었다. 나는 쉬는 순간 자동으로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오늘 나는 쓸모없는 하루를 보냈다고.

하지만 이 공식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천천히 주입된 것에 가까웠다. 우리는 늘 묻는다. “그래서 뭘 했어?” “성과는?” “결과는?” 노력보다 결과가 먼저 평가받고, 과정은 종종 생략된다. 쉬는 시간은 더더욱 기록되지 않는다. 누군가가 지쳐서 잠시 멈췄다는 사실은 이력서에 적히지 않고, 휴식은 칭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배워왔다. 멈추지 않는 사람이 인정받는다고, 버티는 사람이 강하다고, 쉬지 않는 사람이 성실하다고.

문제는 그 믿음이 나를 서서히 압박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는 점점 더 ‘쉬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애썼다. 일이 끝나도 완전히 내려놓지 못했고, 잠시 시간이 비어도 무언가를 채워 넣으려 했다. 쉬는 날에도 생산적인 취미를 가져야 할 것 같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어딘가 불안했다. 머릿속에서는 늘 계산이 돌아갔다. 지금 이 시간은 도움이 되는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가, 남들보다 뒤처지게 하지는 않는가.

여기에 비교가 더해지면 죄책감은 훨씬 강해진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타인의 속도를 훔쳐본다. 누군가는 이미 새로운 목표를 달성했고, 누군가는 또 다른 도전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들의 성과는 압축되어 전달된다. 과정은 보이지 않고 결과만 보인다. 나는 그 장면만 보고 나를 판단했다. 나는 지금 쉬고 있는데, 저 사람은 달리고 있다고. 나는 멈춰 있는데, 저 사람은 성장하고 있다고. 그 비교는 언제나 나를 불리한 위치에 세웠다.

하지만 그 비교에는 큰 착각이 숨어 있다. 나는 타인의 하이라이트와 나의 비하인드를 비교하고 있었다. 그들이 지쳤던 시간, 흔들렸던 순간, 멈춰 있었던 날들은 보지 못한 채, 오직 완성된 장면만을 기준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기준에 맞추지 못하는 나를 책망했다. 쉼은 점점 더 위험한 선택이 되었다. 내가 쉬는 동안 세상은 나를 앞질러 가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쉼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일종의 불안 유발 요인이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생각이 많아진다. 그동안 밀어두었던 질문들이 떠오른다. 나는 잘 가고 있는가, 이 방향이 맞는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바쁠 때는 그 질문을 미룰 수 있다. 할 일이 많다는 이유로, 지금은 생각할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쉬는 순간 그 질문들이 고개를 든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바빠지려 했다. 생각하지 않기 위해 움직였다.

쉼에 대한 죄책감은 결국 두려움에서 시작된다. 내가 뒤처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쓸모없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내 한계를 인정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 두려움은 “쉬어도 된다”는 말을 허락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속삭인다. 조금만 더 버티라고, 지금 멈추면 모든 게 무너질 거라고. 나는 그 목소리를 오래 믿어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렇게 믿고 달려온 시간 끝에서 나는 더 강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쉽게 지치고, 쉽게 무너지고, 사소한 일에도 흔들렸다. 성과는 일시적으로 나를 안심시켰지만, 그 안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음 목표가 생기면 다시 불안해졌고, 잠시라도 비어 있는 시간이 생기면 또다시 초조해졌다. 나는 끝없는 레이스 위에 서 있었다. 도착점은 보이지 않았고, 잠시 멈출 수도 없었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쉼을 게으름으로 오해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통제 불가능함’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쉰다는 건 속도를 늦추는 일이고, 속도를 늦추면 내가 통제하던 리듬이 흔들린다. 나는 내 삶을 늘 일정한 긴장 상태로 유지해야만 안전하다고 믿었다. 긴장을 놓는 순간, 모든 것이 흩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긴장을 붙들고 있었다. 하지만 긴장은 오래 유지될수록 몸과 마음을 마르게 한다.

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다. 쉼은 다시 갈 수 있게 만드는 시간이다. 하지만 성과 중심 사고에 갇혀 있을 때, 우리는 그 시간을 투자로 보지 못한다. 오직 손해처럼 느낀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쉬어도 된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미안해했다. 이렇게 있어도 되나, 이 시간이 낭비는 아닐까,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죄책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씩 관점을 바꾸기 시작했다. 만약 내가 계속 지친 상태로 달린다면, 결국 더 크게 멈출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억지로 버티다 완전히 소진되는 것과, 의식적으로 잠시 쉬는 것 중 무엇이 더 현명한 선택인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 질문에 솔직해지자 답은 생각보다 분명했다. 쉼은 도망이 아니라 전략일 수 있다. 지금 멈추는 것이 오히려 더 멀리 가기 위한 준비일 수 있다.

나는 아직도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여전히 비교는 나를 흔들고, 성과는 나를 자극한다. 하지만 예전처럼 자동으로 나를 몰아붙이지는 않는다. 쉼에 죄책감이 올라오면, 나는 그 감정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 이 죄책감은 어디서 왔는가, 정말 내 목소리인가, 아니면 오래전부터 학습된 기준인가. 그렇게 질문을 던질수록, 나는 조금씩 나의 기준을 다시 세우게 된다.

성과가 나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나를 전부 대변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중이다. 나는 결과가 없을 때도 존재하고, 속도가 느릴 때도 살아 있고, 잠시 멈춰 있을 때도 여전히 나다. 그 사실을 믿는 연습이 곧 쉼에 대한 죄책감을 내려놓는 연습이다.

쉼은 생산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소진을 멈추는 시간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조금씩 이해한다. 나를 지키지 못한 채 얻은 성과는 오래 가지 않는다. 반대로 나를 지키면서 가는 속도는 느려 보여도, 훨씬 안정적이다. 나는 여전히 배워가는 중이다. 성과 중심의 기준에서 조금씩 벗어나, 존재 자체로 나를 인정하는 법을. 그 연습이 쌓일수록, “지금은 쉬어도 괜찮다”는 말은 점점 덜 어색해진다.

나는 나를 설득한다 .지금은 쉬어도 괜찮다”는 말을 반복하는 사람의 태도

결국 쉼은 환경이 허락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허락해주는 것이다. 일이 줄어들어야 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목표가 끝나야 가능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완벽하게 조건이 갖춰지는 순간은 거의 오지 않는다. 늘 해야 할 일은 남아 있고, 정리되지 않은 문제는 존재하고, 더 잘할 수 있었을 것 같은 아쉬움은 뒤에 남는다. 그래서 나는 깨달았다. 기다리면 영원히 못 쉰다는 것을. 누군가 “이제 쉬어도 됩니다”라고 공식적으로 말해주는 날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결국 내가 나를 설득하지 않으면, 나는 계속 미루게 된다.

하지만 나를 설득하는 일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설득은 논리만으로 되지 않는다. 나는 이미 수없이 알고 있었다. 사람도 기계도 쉬어야 오래 간다는 것, 번아웃은 한 번 오면 회복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 휴식은 생산성을 높인다는 것.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몸은 여전히 긴장 상태였다. 그래서 나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했다. 논리 대신 태도를 바꾸기로 했다.

예전의 나는 쉬는 순간을 ‘중단’이라고 생각했다. 멈추면 흐름이 끊기고, 다시 시작하기 어려워질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쉼을 ‘전환’이라고 생각하려고 한다. 달리다가 잠시 걷는 것, 숨이 차서 속도를 낮추는 것, 방향을 점검하기 위해 멈추는 것.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 오래 가기 위한 리듬 조절이라고 바라본다. 이렇게 생각을 조금만 바꿔도, 쉼은 실패가 아니라 선택이 된다.

나는 이제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내가 계속 움직이려는 이유가 진짜 필요 때문인지, 아니면 불안 때문인지. 이 질문은 꽤 강력하다. 필요라면 계속 가도 된다. 하지만 불안이라면, 잠시 멈춰도 된다. 예전에는 그 구분을 하지 않았다. 불안도 필요처럼 착각했다. 마음이 조급하면 무조건 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급함은 대개 외부 기준에서 비롯된다. 누군가의 속도, 누군가의 성과, 막연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것이 나를 밀어붙였을 뿐, 지금 당장 내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아니었다.

쉼에 대한 죄책감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나를 평가하는 기준을 조금 바꾸는 일과도 같다. 나는 더 이상 하루를 “얼마나 해냈는가”로만 정리하지 않으려고 한다. 대신 “오늘 나를 어떻게 대했는가”를 묻는다. 무리하지 않았는지, 스스로를 함부로 다루지 않았는지, 몸의 신호를 무시하지 않았는지. 이 질문에 솔직하게 답하다 보면, 가끔은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날에도 스스로에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된다. 오늘은 잘 버텼다고, 오늘은 무너지지 않게 잘 쉬었다고.

나는 쉼을 거창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한다. 멀리 떠나야만 휴식이 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연락을 끊어야만 쉬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그냥 아무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 생산성을 따지지 않는 시간, 결과로 환산되지 않는 행동이 쉼이 된다. 창밖을 멍하니 보는 것, 좋아하는 음악을 반복해서 듣는 것, 괜히 산책을 나가는 것. 예전 같았으면 “이게 무슨 도움이 되지?”라고 생각했을 행동들이, 지금은 나를 회복시키는 작은 장치가 된다.

물론 여전히 흔들린다. 쉬고 있는 나를 보면 또 다른 내가 속삭인다. 이렇게 있어도 되겠냐고, 뒤처지는 것 아니냐고. 그럴 때 나는 그 목소리를 완전히 없애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인정한다. 아, 또 불안이 올라왔구나. 하지만 그 불안을 사실처럼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불안은 감정이지, 예언이 아니니까. 내가 지금 쉬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실패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연결 고리는 대부분 내 상상 속에 있다.

나는 점점 ‘지속 가능함’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잠깐 빛나는 것보다, 오래 가는 것이 낫다고 느낀다. 그러려면 리듬이 필요하다. 계속 같은 강도로 달릴 수는 없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고, 빠른 구간이 있으면 느린 구간도 있다. 인생을 직선으로만 보던 시선이 조금씩 곡선으로 바뀌고 있다. 이 곡선 속에서 쉼은 필수적인 구간이다. 없으면 전체가 무너진다.

“지금은 쉬어도 괜찮다”는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그것은 나를 존중하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나는 더 이상 나를 소모품처럼 쓰지 않겠다고, 필요할 때는 멈추겠다고, 나를 지키는 쪽을 선택하겠다고 다짐하는 말이다. 이 말은 반복해야 한다. 한 번 말한다고 완전히 믿어지지 않는다. 오래도록 나를 몰아붙여온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계속 말한다. 괜찮다고, 지금은 쉬어도 된다고, 이 멈춤이 나를 약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고.

어쩌면 나는 완전히 죄책감이 없는 상태에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죄책감이 올라와도, 그것에 끌려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쉬는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잠시 멈춘 나를 실패자로 규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여전히 성장하고 싶고, 잘 해내고 싶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 다만 그 방식이 예전과는 조금 다를 뿐이다. 나를 깎아내리며 가는 대신, 나를 지키며 가고 싶다.

나는 오늘도 나를 설득한다.
지금은 쉬어도 괜찮다고.
멈춘다고 해서 내가 사라지는 건 아니라고.
속도가 느려져도, 나는 여전히 나라고.

그리고 이 설득이 반복될수록, 나는 조금씩 덜 불안해진다.
조금씩 덜 조급해지고, 조금씩 더 단단해진다.

쉼은 나를 멈추게 하지 않는다.
쉼은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