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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설득해 ‘모두에게 이해받지 않기’로 했다

by think28148 2026. 2. 24.

관계에서 에너지 소모를 줄이는 결정
오늘은 나는 나를 설득해 모두에게 이해받지 않기로 했다라는 이야기 하러 한다.

 

 

나는 나를 설득해 ‘모두에게 이해받지 않기’로 했다
나는 나를 설득해 ‘모두에게 이해받지 않기’로 했다

 

모두에게 이해받으려다 나를 잃어버린 시간들

나는 오랫동안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여기서 말하는 좋은 사람은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이라기보다, 주변 사람들에게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는 사람에 가까웠다. 말이 부드럽고, 분위기를 해치지 않고, 갈등을 만들지 않고,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사람. 나는 내가 꽤 독립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왔지만, 돌이켜보면 내 선택의 많은 부분이 ‘타인의 이해’에 묶여 있었다. 어떤 말을 할지 고민할 때도, 어떤 결정을 내릴 때도, 심지어 어떤 감정을 드러낼지 판단할 때조차도 나는 항상 한 번 더 생각했다. “이걸 말하면 저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 선택을 하면 누군가 서운해하지 않을까.”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오해받지 않을까.” 나는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예측하고, 반응을 가정하고, 미리 조정했다. 겉으로는 배려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과 이해받고 싶어 하는 욕망이 섞여 있었다.

이해받고 싶다는 감정은 자연스럽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고, 소속감은 생존과 직결된 감각이다. 문제는 그 욕망이 지나치게 커질 때다. 나는 점점 ‘나답게’ 행동하기보다 ‘무난하게’ 행동하는 쪽을 택하기 시작했다. 내 생각이 분명히 있는데도 굳이 말하지 않았고, 불편한 점이 있어도 크게 문제 삼지 않았고, 마음이 상해도 “그럴 수도 있지”라며 넘겼다. 겉으로는 갈등이 줄어들었지만, 내 안에서는 미묘한 피로가 쌓였다. 왜냐하면 나는 매번 내 감정과 생각을 한 번 검열한 뒤에야 꺼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검열은 생각보다 에너지를 많이 소모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하지 못하고, 조금 더 부드럽게, 조금 더 돌려서, 조금 더 안전하게 표현하는 과정은 매번 작은 타협이었다. 그 타협이 반복되면서 나는 점점 흐릿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관계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이유 없이 지치는 날이 많아졌다. 특별히 큰 갈등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누군가와 심하게 다툰 것도 아닌데, 마음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대화를 되짚어보면 표면적으로는 문제없어 보였다. 다들 웃었고, 분위기는 괜찮았고,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런데 나는 피곤했다. 왜일까를 고민하다 보니, 한 가지 사실이 보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계속 ‘조정’하고 있었다. 내 말의 톤을, 내 표정을, 내 반응을, 내 생각의 강도를. 누군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누군가 나를 오해하지 않도록, 누군가 나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도록. 나는 끊임없이 나를 설명하고, 나를 방어하고, 나를 무난하게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해받고 싶다는 마음은 결국 나를 ‘관리’하게 만들었다.

이해받고 싶은 욕망은 생각보다 집요하다. 그것은 단지 “나를 좋아해줬으면 좋겠다”는 수준을 넘어선다. “나를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아줬으면 좋겠다.” “내가 나쁜 의도가 아니라는 걸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나는 타인의 마음속에 있는 나의 이미지를 통제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타인의 인식은 내가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사람은 각자의 경험과 기준으로 나를 해석한다. 내가 아무리 설명해도, 상대는 자신의 렌즈로 나를 본다. 그런데도 나는 그 해석을 바꾸기 위해 애썼다. 말 한마디를 더 보태고,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내 의도를 강조했다. 그 과정은 나를 점점 지치게 했다.

나는 어느 순간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었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모두에게 이해받고 싶어 할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밑바닥에는 불안이 있었다. 누군가 나를 오해하면 관계가 멀어질까 봐, 누군가 나를 부정적으로 보면 나의 가치가 떨어질까 봐, 누군가 나를 싫어하면 내가 외로워질까 봐. 결국 나는 거절과 배제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미리 맞추고, 미리 설명하고, 미리 부드럽게 만들었다. 이해받지 못하는 상황을 최소화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 대가로 나는 점점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렇게 애쓸수록 나는 더 불안해졌다. 왜냐하면 완벽하게 이해받는 순간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각자 다른 언어를 쓴다. 같은 단어를 써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다. 내가 아무리 진심으로 설명해도, 상대는 자기 경험의 필터를 통해 해석한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이해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나는 그 불가능에 가까운 목표를 붙잡고 있었다. 모두에게 이해받고 싶다는 욕망은, 사실상 모두에게 거절당하지 않겠다는 선언과 비슷했다. 나는 관계 속에서 최대한 안전한 위치에 서고 싶었다. 하지만 안전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나를 조정하는 삶은 생각보다 고단했다.

결정적인 순간은 아주 사소한 장면에서 찾아왔다. 내가 한 선택에 대해 누군가가 오해를 했고, 나는 평소처럼 길게 설명하려다가 문득 멈췄다. “내가 이렇게까지 설명해야 하나.” 그 생각이 스쳤다. 물론 설명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 설명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오해받는 상태를 견디기 싫어서 하려던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날 나는 일부러 덜 설명했다. 상대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대화가 끝났지만, 세상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관계가 즉시 끊어지지도 않았다. 그 작은 경험이 내 생각을 흔들었다. 모두에게 완벽히 이해받지 않아도, 관계는 생각보다 쉽게 무너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보였다.

그날 이후 나는 조심스럽게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에게 이해받으려 애쓰기보다, 나를 이해하려는 사람과 깊어지는 쪽을 택해보자고. 모두에게 무난한 사람이 되기보다, 나와 맞는 사람과 편안해지는 쪽을 택해보자고. 이 선택은 겉으로 보면 이기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실은 에너지를 지키기 위한 결정이었다. 나는 한정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그 에너지를 모두에게 설명하고 방어하는 데 쓰기보다, 나를 소모하지 않는 관계에 쓰고 싶어졌다. 그 생각은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동시에 묘하게 안도감을 주었다.

나는 나를 설득했다. “모두에게 이해받지 않아도 괜찮다.” 이 문장은 포기가 아니라 선택이었다. 모든 사람을 설득하는 대신, 나를 설득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관계에서 에너지를 줄인다는 건, 사람을 줄인다는 뜻이 아니라 과도한 설명과 과도한 방어를 줄인다는 뜻이었다. 나는 더 이상 나를 지나치게 증명하려 하지 않기로 했다. 이해받고 싶다는 욕망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것이 나를 끊임없이 소모시키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조정하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작지만, 분명히 나를 가볍게 만들고 있었다.

이해받지 못해도 괜찮다고 인정하는 순간 관계는 재정렬되기 시작한다

모두에게 이해받지 않아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흔들린 건 관계에 대한 나의 관점이었다. 나는 그동안 관계를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가’로 평가해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나를 좋아하면 안정감을 느꼈고, 누군가 나를 오해하면 이유 없이 불안해졌다. 그 불안은 단순히 그 사람 한 명 때문이 아니라, ‘내가 잘못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확장되었다. 그래서 나는 오해를 최대한 빨리 수정하려 애썼고, 갈등의 싹이 보이면 먼저 설명하고 먼저 낮췄다. 이해받지 못하는 상태를 오래 두지 못했다. 그 상태가 마치 나의 결함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모든 사람에게 완벽히 이해받는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사람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다르고, 상처받아온 방식이 다르다. 내가 아무리 솔직하게 말해도, 상대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나를 해석한다. 같은 말을 해도 누군가는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누군가는 방어적으로 받아들이고, 누군가는 냉소적으로 받아들인다. 나는 이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마치 내가 조금만 더 잘 설명하면 모두가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해왔다. 하지만 그것은 과도한 통제 욕구에 가까웠다. 타인의 해석까지 내가 책임지려 했던 셈이다.

이해받지 못해도 괜찮다고 인정하는 순간, 관계의 기준이 바뀌기 시작했다. 예전의 나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나를 줄였다. 갈등이 생길 가능성이 보이면 먼저 한 발 물러났고, 내 생각이 다르더라도 굳이 꺼내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괜히 분위기 흐리지 말자.” “괜히 예민한 사람 되지 말자.” 하지만 이런 선택이 반복되면서, 나는 점점 덜 선명해졌다. 내 취향도, 내 기준도, 내 감정도 점점 희미해졌다. 대신 관계는 겉으로는 평온했지만, 깊이는 얕았다. 나는 누구에게도 크게 미움받지 않았지만, 동시에 누구에게도 깊이 이해받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나를 충분히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해받지 못할 가능성을 감수하고 나를 조금 더 드러내기 시작했을 때, 관계는 두 갈래로 나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조금 더 멀어졌다. 내 솔직함을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었고, 이전의 무난한 태도를 기대했던 사람도 있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오히려 더 가까워졌다. “네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몰랐어.” “그렇게 말해줘서 좋다.” 이런 반응은 내가 모두에게 이해받을 수는 없지만, 누군가에게는 더 정확하게 이해받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관계는 수량이 아니라 밀도라는 걸 그제야 체감했다.

관계에서 에너지가 줄어든다는 건 단순히 사람 수가 줄어든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에너지가 줄어든다는 건 과도한 관리가 줄어든다는 뜻이다. 나는 더 이상 모든 대화에서 나를 조정하려 애쓰지 않았다. 내 의견이 다르면 다르다고 말했고, 이해받지 못할 가능성이 보여도 과도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물론 무례하게 굴겠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나의 의도를 전달했으면, 그 이후의 해석까지 붙잡고 늘어지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나는 더 이상 대화가 끝난 뒤 집에 돌아와 혼자 복기하지 않았다. “내가 그 말을 괜히 했나?” “조금 더 부드럽게 말할 걸 그랬나?” 이런 생각이 줄어들었다. 관계 후 피로도가 눈에 띄게 낮아졌다.

모두에게 이해받으려는 태도는 결국 ‘좋은 사람’의 이미지를 유지하려는 노력과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갈등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고, 누군가에게 불편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좋은 사람이라는 건 누군가의 기준일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솔직한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누군가에게는 조용한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누군가에게는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 불편한 사람일 수도 있다. 모든 기준을 동시에 충족하는 건 불가능하다. 나는 여러 기준을 동시에 맞추려다 보니, 결국 나만 빠져버린 상태가 되었다.

이해받지 못하는 순간을 견디는 연습은 생각보다 중요했다. 처음에는 불편했다. 누군가 내 선택을 고개를 갸웃하며 바라볼 때, 누군가 내 결정을 충분히 납득하지 못한 표정을 지을 때, 나는 본능적으로 설명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 욕구를 한 번 참아보았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 사람이 지금 나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나는 덜 괜찮은 사람이 되는가?” 대부분의 경우, 답은 아니었다. 이해받지 못하는 상태와 나의 가치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결이 없었다. 그 연결은 내가 상상으로 만든 것이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관계는 자연스럽게 재정렬되었다. 억지로 붙잡고 있던 관계는 조금씩 멀어졌고, 무리 없이 이어지던 관계는 더 안정적으로 남았다. 흥미로운 건, 내가 모두에게 이해받으려 애쓰지 않자 오히려 관계가 더 단단해졌다는 점이다. 나를 계속 관리하던 시절에는 작은 오해에도 크게 흔들렸지만, 지금은 오해가 생겨도 관계 전체가 무너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생겼다. 왜냐하면 그 관계는 나의 ‘관리된 모습’이 아니라, 비교적 솔직한 나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이해받지 않겠다고 결정한 이후, 관계는 어떻게 달라졌는가

모두에게 이해받지 않겠다고 스스로를 설득한 이후 가장 먼저 달라진 것은 인간관계의 숫자가 아니라 밀도였다. 나는 더 이상 모든 사람의 감정에 반응하지 않으려고 애썼고, 설명해야 할 일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일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예전의 나는 상대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도 마음이 쓰였고, 답장이 느려도 혹시 내가 무례했는지 곱씹었고, 회식 자리에서 잠시 말이 줄어들어도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괜히 농담을 던졌다. 그 모든 행동의 중심에는 ‘이해받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나를 좋게 봐주길 바라고, 나를 오해하지 않길 바라며, 나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애쓸수록 나는 더 쉽게 오해받았다. 모든 사람의 언어에 맞추다 보니 정작 나의 언어는 흐려졌고, 모든 사람의 기준을 의식하다 보니 나만의 기준은 뒤로 밀려났다. 그래서 결국 나는 나를 설득했다. “모두에게 이해받지 않아도 괜찮다. 이해받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 때문에 누군가와 이해가 맞는 것이다.” 그 문장을 반복해서 마음속에 새기기 시작했다.

이 결정을 하고 나서 가장 큰 변화는 ‘설명’의 양이 줄어든 것이었다. 나는 예전보다 말수가 줄었다기보다, 불필요한 해명을 줄였다.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왜 그 자리에 가지 않았는지, 왜 연락을 늦게 봤는지, 왜 이번에는 거절했는지, 왜 예전처럼 하지 않는지, 그 모든 ‘왜’에 대해 모든 사람에게 납득을 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인정했다. 납득은 상대의 몫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오래 걸렸다. 우리는 종종 오해를 두려워한다. 오해가 쌓이면 관계가 틀어질까 봐, 상대가 나를 부정적으로 볼까 봐, 그래서 가능한 한 모든 상황을 설명하려 한다. 하지만 설명이 늘어날수록 상대의 기대도 늘어난다. 한 번 설명해주면 다음에도 설명해주길 기대하고, 한 번 양보하면 다음에도 양보하길 기대한다. 그렇게 기대는 관성이 된다. 나는 그 관성을 끊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어떤 순간에는 설명을 멈췄다. 오해가 생기더라도, 그 오해를 감당해보기로 했다. 그 결과 놀랍게도, 생각보다 많은 관계가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남아 있는 관계는 더 단단해졌다.

모두에게 이해받지 않겠다는 결정은 관계를 끊겠다는 선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관계의 방식을 바꾸겠다는 다짐이었다. 나는 더 이상 나를 축소하지 않기로 했다. 예전에는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의견을 완곡하게 돌려 말했고, 갈등이 생길까 봐 솔직한 감정을 숨겼다. 하지만 그렇게 숨긴 감정은 결국 다른 방식으로 새어 나왔다. 피로로, 냉소로, 무기력으로. 관계에서 에너지가 빠르게 소모되는 이유는 갈등 때문이 아니라, 억눌린 감정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갈등은 한 번 터지고 나면 정리되지만, 억눌린 감정은 오래 쌓인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하기로 했다. 물론 무례하게 굴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나의 감정을 나의 언어로 표현하겠다는 결심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은 어렵다”, “그 방식은 나와 맞지 않는다”, “나는 그 선택을 하지 않겠다.” 이런 문장들을 입 밖으로 꺼내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왜냐하면 그런 말들은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게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나를 지우는 삶은 결국 나를 소모시키는 삶이었다.

이 선택 이후 나는 관계를 바라보는 기준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과 잘 지내는지가 중요했다면, 이제는 누구와 함께 있을 때 내가 줄어들지 않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나를 작게 만들지 않아도 되는 관계, 나를 과장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 굳이 애써 웃지 않아도 되는 관계. 그런 관계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그 관계 안에서는 나는 편안했다. 이해받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억지로 맞추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감각. 그것이 진짜 연결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체감했다. 모두에게 이해받지 않겠다는 결심은 결국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겠다는 선언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말로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 남기겠다는 선택이었다.

관계에서 에너지 소모가 줄어들자, 내 일상은 조금 더 단순해졌다. 하루가 끝났을 때, 예전처럼 대화 내용을 복기하며 ‘그때 그렇게 말하지 말 걸’ 하고 자책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반응을 과하게 해석하지도 않았다. 상대의 표정, 말투, 단어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던 습관을 줄였다.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할 필요는 없고, 모든 사람이 나를 이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오히려 타인을 더 존중하게 되었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틀린 것이 아니고, 나와 다르다고 해서 부정적인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해는 선택의 문제이지 의무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 사람을 억지로 설득하려 하지 않았고, 나 역시 모든 사람을 완벽히 이해하려 애쓰지 않았다. 그 여백이 관계를 숨 쉬게 만들었다.

물론 이 선택이 항상 편안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오해가 실제로 관계의 거리를 만들기도 했다. 예전 같았으면 해명했을 상황에서, 이번에는 침묵을 택했고, 그 침묵이 거리로 이어진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흔들렸다. 내가 너무 이기적인 선택을 한 건 아닐까, 조금만 더 설명했으면 괜찮지 않았을까, 여전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설명을 멈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대부분 같았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설명이 상대를 위한 배려라기보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두려움으로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았다.

모두에게 이해받지 않겠다는 결정은 결국 나를 중심에 두겠다는 의미였다. 관계의 중심이 항상 타인의 감정과 평가에 놓여 있으면, 나는 언제든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중심을 나에게 두면, 관계는 선택의 영역이 된다. 나는 누군가와 가까워질 수도 있고, 거리를 둘 수도 있고, 잠시 멈출 수도 있다. 그 선택이 가능해지자 관계는 부담이 아니라 가능성이 되었다. 예전에는 만남이 많을수록 내가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졌다면, 이제는 나에게 맞는 만남이 있을 때 비로소 안정감을 느낀다. 양보다 질이라는 말은 흔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체감하기까지는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했다.

관계에서 에너지를 덜 소모하게 되자, 남은 에너지는 나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나는 나의 취향을 다시 탐색했고, 혼자 있는 시간을 죄책감 없이 보냈고, 굳이 누군가와 공유하지 않아도 되는 감정을 그대로 두었다. 모든 경험을 관계 안에서 증명하려 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무언가를 이루면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었고, 슬프면 누군가가 알아주길 바랐다. 하지만 이제는 나 스스로 충분히 알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해받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은, 동시에 나 스스로를 이해하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왜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 왜 그 자리에 가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내가 알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결국 나는 깨달았다. 모두에게 이해받으려는 노력은 사실 관계를 위한 것이 아니라, 버림받지 않으려는 본능에 가까웠다는 것을. 하지만 모든 관계는 언젠가 변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멀어질 사람은 멀어지고,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 사실을 인정하자 오히려 관계에 대한 집착이 줄어들었다. 집착이 줄어드니 억지로 붙잡지 않게 되었고, 억지로 붙잡지 않으니 관계는 자연스럽게 정리되었다. 남은 것은 얇지만 단단한 연결이었다.

나는 여전히 사람을 좋아한다. 관계를 통해 배우고 성장한다고 믿는다. 다만 이제는 나를 잃어가며 관계를 유지하지는 않는다. 이해받지 못할 가능성을 감수하면서도 솔직해지기를 택한다. 그 선택은 때로는 외로움을 동반하지만, 동시에 깊은 안정감을 준다. 모두에게 이해받지 않겠다고 결정한 이후, 나는 더 이상 모든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대신 나와 결이 맞는 문 앞에서 천천히 서 있다. 그 문이 열리면 들어가고, 열리지 않으면 돌아선다. 그것이 나를 지키는 방식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관계에서 에너지를 줄이는 결정은 차갑게 변하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더 오래 따뜻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스스로를 설득한다. 이해받지 못해도 괜찮다. 나를 잃지 않는 한, 관계는 다시 시작될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