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사람 옆에서 드러나는 내 불안
오늘은 상대가 너무 정상적이라 내가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졌던 경험에 대해 이야기 하러 합니다.

그는 안정되어 있었고, 나는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그 사람은 특별히 눈에 띄는 사람이 아니었다. 과하게 다정하지도 않았고, 과하게 차갑지도 않았다. 감정 표현은 적당했고, 반응은 일정했고, 갈등 상황에서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무언가를 요구할 때는 분명했지만 강요하지 않았고, 거절당해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런 사람을 ‘정상적’이라고 불렀다. 그 단어에는 존중과 동시에 약간의 거리감이 섞여 있었다. 그는 건강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 사람처럼 보였고, 나는 그 옆에 서 있을 때마다 묘하게 초라해졌다. 그가 나를 비난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도, 나는 자꾸만 내가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는 감정이 생기면 바로 표현했고, 불편하면 조용히 말했고, 서운하면 설명했다. 감정이 관계를 파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처럼 보였다. 반면 나는 감정을 오래 붙잡고 있다가 갑자기 터뜨리거나, 아니면 끝까지 참아버리는 쪽에 가까웠다. 그는 문제를 문제로만 다뤘고, 나는 문제를 나 자신으로 확장했다. 그는 “이 상황이 불편하다”고 말했지만, 나는 “내가 잘못된 사람인가”라고 해석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였지만, 관계가 쌓일수록 크게 느껴졌다.
그의 안정감은 나를 편안하게 만들기보다, 오히려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는 일관성이 있었고, 나는 기복이 있었다. 그는 감정을 정리한 뒤 말했고, 나는 감정이 정리되기 전에도 흔들렸다. 그는 자기 기준이 분명했고, 나는 상대의 반응에 따라 기준이 바뀌었다. 나는 그를 보며 부러움을 느끼는 동시에 위축되었다. 저렇게 살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저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더 크게 느껴졌다.
건강한 사람 옆에 서 있으면, 내 불안이 더 선명해진다. 혼자 있을 때는 몰랐던 불균형이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나는 혼자 있을 때는 그럭저럭 괜찮다고 느꼈다. 감정 기복도, 예민함도, 불안도 그냥 내 성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안정감과 나의 흔들림이 나란히 놓이는 순간, 나는 처음으로 그것을 ‘차이’로 인식했다. 그리고 그 차이는 곧 비교로 이어졌다. 비교가 시작되면 관계는 더 이상 편안하지 않다.
그는 나를 이상하다고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나의 감정을 이해하려 했고, 내가 불안해할 때도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그런데 그 기다림마저 나를 더 작게 만들었다. 나는 그가 기다려주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하면서도, 동시에 미안해졌다. 왜 나는 저 사람처럼 단단하지 못할까. 왜 나는 사소한 일에도 이렇게 요동칠까. 왜 나는 늘 확신이 부족할까. 이 질문들은 그가 던진 것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던진 것이었다.
나는 점점 더 조심스러워졌다. 감정을 드러내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했고, 불안을 말하기 전에 ‘이게 과한 건 아닐까’라고 스스로를 점검했다. 그의 반응은 변하지 않았지만, 나의 태도는 변해갔다. 나는 더 정제된 모습으로 보이고 싶어졌고, 더 정상적인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졌다. 문제는 내가 생각하는 ‘정상’의 기준이 이미 그를 기준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나는 내 리듬을 잃고, 그의 리듬에 맞추려 했다.
그의 건강함은 나를 치유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의 취약함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물론 그 거울은 공격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선명했다. 나는 그 앞에서 나의 미성숙함을 더 자주 인식했다. 그리고 그 인식은 성찰이 아니라 자책으로 흘러갔다. 나는 점점 더 나를 고쳐야 할 사람처럼 느끼기 시작했다.
그와의 대화는 평온했지만, 내 안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논리적으로 설명했고, 나는 감정적으로 반응했다. 그는 상황을 구분했고, 나는 관계 전체로 확대했다. 그는 갈등을 사건으로 다뤘고, 나는 그것을 존재의 문제로 받아들였다. 이 차이는 그를 더 성숙해 보이게 했고, 나를 더 불안정하게 보이게 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져 있다고 느꼈다. 그는 정상의 영역에 서 있고, 나는 그 바깥 어딘가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내가 ‘정상’이라고 부른 그의 모습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하나의 방식일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내가 ‘이상하다’고 느낀 나의 반응 역시 결함이 아니라 또 다른 방식일 수 있다는 것을. 다만 나는 그 차이를 차이로 보지 못하고, 위계로 해석했다. 그는 위에 있고, 나는 아래에 있다고. 그 해석이 나를 괴롭혔다.
건강한 사람 옆에서 드러나는 불안은 단순히 부러움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나 자신을 얼마나 조건부로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신호다. 나는 안정적일 때만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었고, 흔들리면 부족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의 안정감은 나를 위로하지 못했다. 오히려 내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지점처럼 느껴졌다.
그는 잘못이 없었다. 그는 그냥 그의 방식으로 존재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그 존재를 기준으로 삼아 나를 재단했다. 그리고 그 재단은 점점 더 엄격해졌다. 나는 스스로를 이상한 사람으로 분류했고, 그 옆에 서 있기 위해 더 애썼다. 그러나 애씀은 긴장을 낳고, 긴장은 결국 거리감을 만든다. 나는 그를 밀어내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 앞에서 계속 작아지는 나를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왜 건강한 사람 앞에서 내 불안은 더 선명해지는가 (애착 구조와 자기 수용의 결핍)
건강한 사람 옆에서 내가 더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졌던 이유는 단순한 비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이면에는 더 오래된 감정 구조가 작동하고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관계를 ‘안전 확인’의 장으로 사용해왔다. 상대의 반응을 통해 내가 괜찮은 사람인지 확인하고, 상대의 표정을 통해 내가 버림받지 않을지 예측하고, 상대의 말투를 통해 내가 사랑받고 있는지 측정했다. 이 방식은 익숙했지만 안정적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기준이 늘 바깥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나와 다르게 보였다. 그는 상대의 반응에 따라 자신의 가치를 흔들지 않았고, 갈등이 생겨도 그것을 존재의 위협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그는 상황을 상황으로, 감정을 감정으로 분리했다. 나는 그 분리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안정감은 나에게 위로가 아니라 낯섦으로 다가왔다.
애착 구조의 차이는 관계에서 아주 미묘하게 드러난다. 나는 누군가가 조금만 거리를 두어도 그 이유를 과하게 해석하는 편이었다. 연락이 늦어지면 내가 무언가 잘못했는지 생각했고, 반응이 짧아지면 관심이 식은 건 아닐지 불안해했다. 반면 그는 같은 상황에서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바쁠 수 있지”라고 말했고, “그럴 수도 있지”라고 넘겼다. 나는 그 태도를 보며 부러움을 느끼는 동시에 위축되었다. 왜 나는 이렇게 쉽게 흔들리는가. 왜 나는 늘 최악의 가능성을 먼저 상상하는가. 그의 평정은 나의 불안을 더 또렷하게 비추는 배경이 되었다.
문제는 내가 그 차이를 ‘성향의 차이’로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나는 그것을 성숙함의 차이로 해석했다. 그는 건강하고, 나는 불안정하다고. 그는 정상이고, 나는 어딘가 고장 나 있다고. 이 해석은 관계를 수직으로 만든다. 내가 나를 낮게 두는 순간, 그의 모든 행동은 더 단단해 보이고, 나의 모든 반응은 더 유치해 보인다. 나는 점점 더 나를 검열하기 시작했다. 감정이 올라와도 바로 말하지 않았고, 불안이 생겨도 혼자서 삭이려 했다. ‘이 정도는 내가 정리해야지.’ ‘이걸 말하면 내가 이상해 보이겠지.’ 이렇게 스스로를 다듬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나는 자연스러움을 잃어갔다.
자기 수용의 결핍은 여기서 더 선명해진다. 나는 내가 예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 예민함을 부정하고 싶어 했다. 나는 내가 기복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모습은 보여주지 말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니 그의 안정감은 나를 안심시키는 대신, 나의 결핍을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 나는 그 앞에서 내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지 못했고, 대신 더 나은 버전의 나를 연출하려 했다. 하지만 연출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나는 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존재했지만, 나는 끊임없이 조율하고 있었다.
건강한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감정의 책임을 타인에게 넘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네가 나를 불안하게 한다”라고 말하지 않았고, 대신 “나는 이런 상황에서 조금 불편하다”라고 말했다. 이 차이는 결정적이다. 그는 감정을 소유했고, 나는 감정을 관계 전체로 확장했다. 나는 불안이 생기면 그것이 곧 관계의 위기라고 느꼈다. 그래서 작은 흔들림에도 과하게 반응했다. 그는 흔들림을 일시적인 현상으로 봤고, 나는 그것을 구조적인 문제로 해석했다. 이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나를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비교 심리 역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우리는 종종 건강한 사람을 이상적인 기준으로 삼는다. 그 기준은 명확하고 안정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준으로 삼는 순간, 나의 현재 상태는 자동으로 부족한 위치에 놓인다. 나는 그를 기준으로 나를 평가했고, 그 평가에서 나는 늘 낮은 점수를 받았다. 이 평가는 실제 상황보다 훨씬 가혹했다. 그는 나를 평가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를 통해 나를 재단했다. 그리고 이 자기 재단은 반복될수록 자존감을 갉아먹었다.
아이러니한 점은, 그의 건강함이 나를 배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나를 고치려 하지 않았고, 나의 불안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차분히 들었고, 필요한 만큼만 반응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침착함을 ‘거리감’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내가 격하게 흔들릴 때 그가 크게 동요하지 않으면, 나는 혼자만 과민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내가 폭풍 속에 서 있을 때 그는 잔잔한 호수처럼 보였고, 그 차이는 나를 더 외롭게 만들었다. 사실 그는 단지 중심을 잃지 않았을 뿐인데, 나는 그 중심을 냉정함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이 모든 과정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모인다. 나는 왜 나의 불안을 그대로 인정하지 못했는가. 왜 건강한 사람 앞에서 나의 흔들림을 결함처럼 여겼는가. 아마도 나는 오래전부터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왔기 때문이다. 괜찮은 사람은 과하게 불안해하지 않고, 감정을 통제할 줄 알고, 관계에서 지나치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믿어왔다. 그래서 그 기준에 가까워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나는 자동으로 나를 부족한 위치에 놓았다. 그를 존중하는 방식이 아니라, 나를 깎아내리는 방식으로.
건강한 사람 옆에서 드러나는 불안은 실은 치유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관계는 나의 오래된 패턴을 선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통해 내가 얼마나 외부 기준에 의존해왔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그를 통해 내가 얼마나 쉽게 나를 의심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를 통해, 안정감이란 타인의 태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만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이해가 곧바로 편안함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구조를 아는 것과, 그 구조를 벗어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나는 여전히 가끔 그 앞에서 작아지고, 여전히 가끔 나를 이상한 사람처럼 느낀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감각이 전부 사실은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비교가 만들어낸 왜곡일 수 있고, 오래된 애착 패턴이 재생된 장면일 수 있다. 이 인식은 완벽하지 않지만, 최소한 나를 무조건적으로 비난하지는 않게 만든다.
건강한 사람 옆에서 불안이 드러나는 이유는, 그 사람이 나를 위협해서가 아니라, 내가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차이를 위계로 해석하는 순간, 나는 나를 아래에 둔다. 그러나 차이를 차이로 인정하는 순간, 관계는 수평으로 돌아올 수 있다. 그 전환이 다음 단계다.
‘정상’이라는 환상을 내려놓고, 내 불안을 포함한 채 서는 법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일은 “정상”이라는 단어를 의심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를 정상이라고 불렀지만, 그 말 안에는 이미 위계가 들어 있었다. 정상은 표준이고, 표준은 기준이며, 기준은 평가를 전제한다. 내가 그를 정상이라 부르는 순간, 나는 나를 그 기준 바깥에 둔다. 이 구조가 반복될수록 나는 점점 더 나를 수정해야 할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깨닫기 시작했다. 그가 보여준 안정감은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하나의 방식일 뿐이라는 것을. 감정을 빠르게 정리하는 것도 방식이고, 오래 붙잡는 것도 방식이다. 갈등을 바로 꺼내는 것도 방식이고, 시간을 두고 정리하는 것도 방식이다. 어느 쪽이 더 우월하다고 단정하는 순간, 관계는 이미 기울어진다.
나는 오랫동안 나의 불안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해왔다. 불안은 미성숙함의 증거라고 생각했고, 흔들림은 고쳐야 할 결함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건강해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나는 더 빨리 나를 고치고 싶어졌다. 하지만 불안을 없애려 할수록 오히려 더 커졌다. 왜냐하면 불안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나를 보호하려는 오래된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관계 속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 과하게 예측했고, 버려지지 않기 위해 과하게 민감해졌고, 거절당하지 않기 위해 과하게 눈치를 봤다. 이 전략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나를 살아남게 해온 방식이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정상”만을 향해 달리려 했기 때문에, 나는 그 사람 옆에서 더 위축되었다.
어느 순간 나는 방향을 바꿨다. 불안을 지우는 대신, 불안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왜 이렇게 빨리 흔들릴까’라고 자책하는 대신, ‘나는 왜 이렇게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을까’를 묻기 시작했다. 질문이 바뀌자 해석도 바뀌었다. 나는 결함이 아니라 맥락을 보기 시작했다. 과거의 경험, 반복된 관계 패턴, 거절에 대한 두려움, 인정받고 싶은 욕구. 이런 요소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나의 흔들림은 더 이상 수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해 가능한 결과였다.
건강한 사람 옆에 서는 법은 그 사람처럼 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나의 결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나는 빠르게 안정되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갈등이 생기면 바로 말하지 못할 수도 있다. 감정이 오래 남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이 나를 이상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것은 나의 속도이고, 나의 리듬이다. 관계는 두 리듬이 만나는 공간이지, 하나의 리듬으로 통일되는 공간이 아니다. 내가 나의 리듬을 인정하지 않으면, 관계는 늘 조율의 부담으로 변한다.
또 하나의 전환은 비교를 멈추는 것이었다. 그는 그의 과정을 통해 지금의 안정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 역시 흔들림을 겪었을지 모른다. 나는 결과만 보고 나를 평가했다. 그러나 각자의 시간은 다르다. 나는 지금 나의 자리에서 배우고 있고, 그 역시 그의 자리에서 계속 배우고 있다. 이 관점을 받아들이자, 관계는 더 이상 시험장이 아니었다. 그는 기준이 아니라 동반자가 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감정을 숨기지 않는 연습이었다. 나는 여전히 불안해질 때가 있고, 여전히 과하게 해석할 때가 있다. 하지만 예전처럼 그것을 완전히 정리한 뒤에만 말하지는 않는다. “내가 조금 예민해진 것 같아”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고, “지금은 내가 불안해서 그런 걸 수도 있어”라고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문장들은 나를 약하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관계를 현실적으로 만들었다. 완벽히 안정된 사람들끼리만 맺어지는 관계는 없다. 서로의 불완전함을 드러내고도 유지되는 관계가 더 건강하다.
나는 이제 그 사람 옆에서 예전만큼 작아지지 않는다. 여전히 부러울 때는 있다. 여전히 나를 돌아보게 되는 순간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곧 나의 열등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와 다른 결을 가진 사람일 뿐이다. 그는 빠르게 회복하는 사람이고, 나는 천천히 소화하는 사람이다. 그는 중심을 잘 잡는 사람이고, 나는 중심을 찾는 과정을 겪는 사람이다. 이 차이는 위계가 아니라 다양성이다.
건강한 사람 옆에서 드러나는 불안은 나를 무너뜨리기 위한 신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아직 나를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알림이었다. 그리고 그 알림을 무시하지 않고 들여다보았을 때, 나는 조금씩 나의 자리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제 나는 그를 정상이라 부르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그는 그의 방식으로 안정된 사람이고, 나는 나의 방식으로 배우는 사람이다. 이 문장은 나를 아래에 두지 않는다.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균형은 완벽함이 아니라 수평이다. 내가 나를 낮추지 않고, 상대를 이상화하지 않을 때 관계는 숨을 쉰다. 나는 더 이상 그 앞에서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지 않는다. 대신 “지금의 나”로 존재하려 한다. 불안이 있으면 있는 대로, 기복이 있으면 있는 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 있는 사람으로.
그는 여전히 건강한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과정 중인 사람이다. 그리고 과정 중인 사람도 관계 속에 설 자격이 있다. 건강한 사람 옆에서 불안이 드러났다는 사실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성장의 시작이었다. 이제 나는 도망치지 않는다. 대신 내 자리에서 선다. 그 자리에서, 나는 더 이상 비교의 그림자 속에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