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진 열등감이 관계를 왜곡할 때
오늘은 친절한 사람 앞에서만 자꾸 내가 작아지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러 합니다.

그는 다정했는데, 나는 왜 자꾸 위축되었을까
나는 한동안 친절한 사람을 만나면 안심이 아니라 긴장부터 느꼈다. 이상한 일이었다. 무례한 사람 앞에서는 오히려 경계심이 또렷해졌다. 선을 긋고, 거리를 두고, 필요하면 단호해질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정한 사람 앞에서는 몸이 먼저 움츠러들었다. 그가 배려의 말을 건넬수록 나는 더 조심스러워졌고, 그가 나를 이해하려 애쓸수록 나는 더 많은 설명을 덧붙여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는데, 나는 계속 무언가를 증명해야 할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는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고, 작은 변화도 알아채주었고, 내가 실수해도 웃으며 넘겼다. 그런데 나는 그가 웃어넘긴 실수를 밤새 복기했다. “괜찮다”는 말을 듣고도 괜찮지 않았다. 오히려 더 불편했다. 내가 받은 이해만큼 나는 그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것 같았고, 내가 받은 배려만큼 나는 그를 배려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점점 더 조심스러운 사람이 되었다. 내 말 한마디가 혹시 그의 호의를 갉아먹지는 않을지, 내 피로가 혹시 그의 인내를 시험하는 건 아닐지, 내 부족함이 혹시 그의 기대를 배반하는 건 아닐지, 그런 생각들이 조용히 쌓여갔다.
돌이켜보면 그는 변한 적이 없었다. 변한 건 내 해석이었다. 나는 그의 친절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친절을 통과하는 동안 내 안의 어떤 감정이 계속 작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열등감이었다. 나는 그가 나보다 더 단단하고, 더 성숙하고, 더 안정된 사람이라고 가정했다. 그리고 그 가정 위에서 관계를 재구성했다. 나는 수혜자였고 그는 제공자였다. 나는 도움받는 위치였고 그는 베푸는 위치였다. 이 구도는 실제로 그가 만든 것이 아니었다. 내가 만든 구조였다.
열등감은 관계를 수직으로 재배열하는 힘이 있다. 아무리 평평한 자리라도, 그 감정이 개입하는 순간 누군가는 위에 있고 누군가는 아래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나는 그의 친절을 수평적인 교류로 보지 못하고,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호의로 해석했다. 그래서 감사보다 미안함이 먼저 올라왔다. 고마움은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미안함은 스스로를 낮출 때 생긴다. 나는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감각을 반복적으로 만들었다. 그는 아무런 장부를 펼친 적이 없었지만, 나는 혼자서 계산기를 두드렸다. 오늘 받은 이해, 어제 받은 배려, 지난달에 받은 위로. 그 모든 것을 합산해보며 나는 점점 더 작은 사람이 되었다.
그가 나를 동등한 존재로 대하려 할수록, 나는 그 자리에 올라가지 못하는 사람처럼 느꼈다. 그의 안정감은 나의 불안정함을 드러내는 거울처럼 느껴졌고, 그의 여유는 나의 조급함을 더 선명하게 비추는 조명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자꾸만 나를 비교했다. 그는 왜 저렇게 담담할까, 나는 왜 이렇게 쉽게 흔들릴까. 그는 왜 저렇게 따뜻할까, 나는 왜 이렇게 계산적일까. 이런 질문들이 반복되면서 나는 점점 나 자신을 축소했다.
문제는 그의 친절이 아니었다. 문제는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나는 이미 나 자신에 대해 “조금 부족한 사람”이라는 전제를 깔아두고 있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에게 충분히 따뜻해질 때, 나는 그것을 당연한 교류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마치 과분한 선물을 받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 선물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더 애쓰고, 더 조심하고, 더 낮아졌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나를 자연스럽게 드러내지 못했다. 나는 그에게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이 차이는 미묘하지만 결정적이었다.
친절한 사람 앞에서만 작아지는 이유는, 그 사람이 나를 작게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람을 기준 삼아 나를 재단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표준으로 설정하고, 그 표준에 미치지 못하는 나를 감점했다. 그가 건넨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나를 평가하는 잣대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그는 나를 평가하지 않았지만, 나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평가했다. 그래서 나는 편안해질 수 없었다. 친절이 계속될수록, 나는 더 완벽해져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느꼈다. 그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이, 오히려 내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더 선명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인정하게 되었다. 내가 작아진 이유는 그의 다정함이 너무 커서가 아니라, 내 안의 열등감이 조용히 관계를 왜곡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그를 위에 올려두고, 그 아래에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 구조를 깨지 않는 한, 아무리 좋은 사람을 만나도 나는 계속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천천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열등감은 왜 사랑을 경쟁으로 바꾸는가
열등감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해석의 방식이다. 어떤 상황을 어떻게 읽어낼지에 대한 자동화된 기준이며, 그 기준은 대개 나를 불리한 위치에 세우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친절한 사람을 마주했을 때 내가 느꼈던 불편함도 바로 그 해석의 틀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단지 다정했을 뿐인데, 나는 그 다정함을 능력으로 환산했고, 성숙함으로 점수화했고, 인격의 높이로 측정했다. 그리고 그 측정의 결과를 바탕으로 나를 비교 대상에 올려두었다. 문제는 그 비교가 객관적인 평가가 아니라, 이미 나를 낮춰놓은 상태에서 시작된 평가였다는 점이다.
나는 그가 나를 기다려주는 모습을 보며 ‘저 사람은 나보다 훨씬 여유 있는 사람’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가 화를 내지 않는 모습을 보며 ‘나는 저렇게 감정을 다루지 못한다’고 단정했다. 그가 실수를 이해해주는 장면을 보며 ‘나는 저 정도로 너그럽지 못하다’고 자책했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모두 부분적인 장면에 불과했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그것들이 축적되어 하나의 이미지가 되었다. 그는 성숙하고, 나는 미숙하다. 그는 안정적이고, 나는 불안정하다. 그는 주는 사람이고, 나는 받는 사람이다. 이 서사는 조용히 굳어졌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 관계를 수평이 아니라 수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열등감은 사랑을 교환이 아닌 경쟁으로 바꾼다. 누가 더 이해심이 많은지, 누가 더 배려하는지, 누가 더 성숙한지, 누가 더 관계를 잘 이끄는지, 그런 보이지 않는 항목들이 생겨난다. 그리고 나는 그 항목들에서 늘 뒤처진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는 나에게 무언가를 증명하라고 한 적이 없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증명하라고 요구했다. 그가 실수해도 나는 괜찮았지만, 내가 실수하면 그것은 감점 요소가 되었다. 그가 피곤해 보이면 나는 이해하려 했지만, 내가 피곤해 보이면 그것은 미안함의 근거가 되었다. 같은 상황에서도 나에게 적용되는 기준은 훨씬 엄격했다.
이런 구조 안에서 나는 자연스러움을 잃어갔다. 어떤 말을 하기 전에 먼저 계산했다. 이 말이 혹시 철없어 보이지는 않을지, 이 감정이 혹시 과장된 건 아닐지, 이 부탁이 혹시 부담이 되지는 않을지. 나는 그의 반응을 예상하며 미리 나를 수정했다. 그렇게 수정된 나는 안전했지만, 진짜 나는 아니었다. 그는 아마도 내가 점점 조심스러워지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를 정확히 짚어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유는 그의 행동이 아니라, 나의 해석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열등감이 사랑을 경쟁으로 바꾸는 또 다른 방식은 ‘균형 강박’이다. 나는 그가 나에게 해준 만큼 반드시 돌려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가 내 이야기를 한 시간 들어주면, 나도 언젠가 그의 이야기를 한 시간 들어주어야 했다. 그가 힘들 때 나를 찾아왔다면, 나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응답해야 했다. 물론 관계에는 상호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내가 느낀 것은 자연스러운 상호성이 아니라, 빚을 청산해야 한다는 압박이었다. 나는 그의 친절을 선물로 받지 못하고, 외상으로 처리했다. 그래서 관계는 점점 편안함이 아니라 긴장 속에서 유지되었다.
이 균형 강박은 나를 과도하게 애쓰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나는 나의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맞추려 했다. 피곤해도 괜찮은 척했고, 힘들어도 충분히 여유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와 비슷한 수준의 안정감을 보여주어야 동등해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써 만들어낸 안정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순간에는 감정이 터져 나왔고, 그때마다 나는 더 크게 자책했다. “왜 나는 저 사람처럼 일관되지 못할까.” 이렇게 다시 비교가 시작되었다.
사랑이 경쟁으로 변할 때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솔직함이다. 나는 약한 모습을 보이면 점수가 깎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나를 충분히 이해해준다고 해도, 나는 그 이해를 신뢰하지 못했다. 이해받는 순간에도 나는 ‘이해받을 자격’을 계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나를 존중하는 만큼, 나 역시 그를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이 아니라, 그만큼의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는 압박이 앞섰다. 그래서 나는 그의 장점을 나의 결핍을 드러내는 증거로 사용했다. 그의 장점은 원래 그 자체로 존중받으면 될 일이었는데, 나는 그것을 비교의 기준으로 끌어내렸다.
열등감은 이렇게 왜곡된 번역기를 통해 관계를 해석한다. 그는 “같이 가자”고 말했는데, 나는 “따라와도 된다”고 들었다. 그는 “괜찮다”고 말했는데, 나는 “나는 이미 괜찮은 사람이고 너는 아직 부족하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였다. 그는 단지 옆에 서 있었는데, 나는 그를 한 계단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그 위에 있는 사람을 올려다보며 나 자신을 평가했다. 이 모든 과정은 조용하고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 없는 관계였지만, 내 안에서는 끊임없는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경쟁은 사실 그를 향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나는 그를 이기고 싶은 게 아니라, 나의 열등감을 이기고 싶었다. 그러나 방향을 잘못 잡았다. 나는 내 감정을 돌보는 대신, 그와의 관계 속에서 점수를 올리려 했다. 더 잘 이해하고, 더 성숙해지고, 더 안정적인 사람이 되면 이 불편함이 사라질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불편함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문제는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자기 인식의 왜곡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나는 질문을 바꾸기 시작했다. “왜 나는 저 사람보다 부족할까”가 아니라, “왜 나는 나를 이렇게 쉽게 부족한 쪽에 세울까”라고 묻기 시작했다. 그 질문은 방향을 완전히 바꾸었다. 나는 그를 분석하는 대신, 나의 기준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왜 누군가의 장점을 보면 자동으로 나를 감점할까. 나는 왜 다정함을 보면 고마움보다 위축을 먼저 느낄까. 나는 왜 동등하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스스로를 동등한 위치에 두지 못할까. 이 질문들 속에서 나는 깨닫기 시작했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이미 기울어져 있었고, 그 기울기가 관계를 왜곡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열등감은 사라지지 않아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관계의 주도권을 쥐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사랑을 경쟁으로 바꾸는 자동 반응을 인식하는 것, 비교의 표를 펼치는 순간을 알아차리는 것, 그리고 그 표를 조용히 덮는 연습을 하는 것. 그는 나의 적이 아니고, 나의 심사위원도 아니다. 그는 단지 나와 다른 결을 가진 사람일 뿐이다. 그 다름을 위계로 번역하지 않을 때, 사랑은 다시 교류로 돌아온다. 그리고 나는 조금씩, 점수판 없이도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는 감각을 배워가고 있다.
작아지지 않기 위해, 나를 같은 높이에 올려두는 연습
나는 오랫동안 관계 안에서 ‘같은 높이’에 서 있다는 감각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가 나보다 거칠게 굴면 나는 방어적으로 단단해졌고, 누군가가 나보다 다정하게 굴면 나는 자동으로 한 발 물러섰다. 마치 세상에는 위와 아래만 있고, 나란히 서 있는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반응했다. 그래서 친절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는 마음속에서 스스로를 낮추는 의식을 치렀다. “나는 아직 부족하니까, 나는 아직 덜 성숙하니까, 나는 아직 더 배워야 하니까.” 이런 생각들이 나를 조용히 아래쪽으로 밀어냈다. 그 상태에서 아무리 상대가 나를 끌어올리려 해도, 나는 이미 나를 한 단계 낮춰둔 채로 관계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연습을 시작했다. 상대의 태도가 아니라, 내 자동 반응을 다루는 연습이었다. 친절을 받았을 때 곧바로 미안함으로 번역하지 않는 것, 배려를 받았을 때 나의 결핍을 증명하려 들지 않는 것, 이해를 받았을 때 나를 과하게 설명하며 정당화하지 않는 것. 생각보다 이 연습은 쉽지 않았다. “고마워”라고만 말하면 될 상황에서도 나는 습관처럼 “미안해, 내가 원래 이런 걸 잘 못해서”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어졌다. 그 말을 하지 않으면 예의가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점점 알게 되었다. 그 문장은 예의의 표현이 아니라, 나를 낮추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같은 높이에 선다는 것은 상대를 깎아내리는 것도 아니고, 나를 과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자리를 인정하는 일이다. 그는 그의 경험과 시간 속에서 단단해진 사람이고, 나는 나의 경험과 시간 속에서 형성된 사람이다. 우리의 결은 다를 수 있지만, 그 다름이 곧 우열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동안 다름을 계급처럼 해석해왔다. 그가 더 차분하면 그는 위에 있고, 내가 더 불안하면 나는 아래에 있는 것처럼. 그러나 차분함과 불안함은 위치가 아니라 상태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조금씩 나를 다시 제자리에 세울 수 있었다.
이 연습에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부족함을 인정하되, 그것으로 나를 축소하지 않는 태도’를 배우는 것이었다. 나는 여전히 서툴다. 관계에서 어색한 순간을 만들기도 하고, 감정이 앞서기도 하고, 때로는 과하게 예민해지기도 한다. 예전에는 그런 모습을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다. 친절한 사람 앞에서는 특히 더 그랬다. 그는 안정적인데 나는 불안정한 것 같았고, 그는 여유로운데 나는 조급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불균형을 견뎌보기로 했다. 내가 완전히 준비된 상태가 아니어도, 내가 완전히 단단해지지 않았어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기로 했다.
같은 높이에 서는 연습은 나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예전에는 그가 힘들어 보이면 나는 먼저 나를 지웠다. “나는 괜찮아”라는 말을 습관처럼 반복했다. 혹시라도 나의 감정이 그의 부담이 될까 봐, 혹시라도 내가 더 약해 보일까 봐. 하지만 그렇게 나를 지우는 동안 관계는 점점 불균형해졌다. 그는 나를 이해해주고 있었지만, 나는 나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 상태에서는 아무리 서로를 존중해도, 실질적인 동등함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나의 상태를 말하기 시작했다. “나도 지금 좀 흔들리고 있어.” “사실은 조금 불안해.” 이런 말들은 나를 낮추는 말이 아니라, 나를 드러내는 말이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말들은 관계를 무겁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만들었다.
나는 또한 상대의 장점을 나의 결핍을 증명하는 도구로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는 여전히 다정하고, 여전히 세심하고, 여전히 성숙하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것을 보며 나를 깎아내리기보다, 단순히 “저 사람은 저런 방식으로 살아왔구나”라고 이해하려 한다. 그의 다정함은 그의 것이고, 나의 서툼은 나의 것이다. 그리고 그 두 가지는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내가 조금 더 직선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내가 감정을 바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해서, 내가 관계에서 느리게 배우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것이 곧 나의 열등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지 다른 결일 뿐이다.
같은 높이에 선다는 것은 때로는 불편하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조도,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구조도 아닌, 마주 보는 구조는 숨을 곳이 없다. 그 자리에서는 나를 과장할 수도, 과도하게 겸손할 수도 없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 서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 자리는 처음에는 어색했다. 나는 여전히 가끔은 자동으로 나를 낮추고, 가끔은 괜히 더 강한 척을 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 순간을 알아차릴 수 있다. “아, 또 내가 나를 한 칸 아래에 두고 있구나.” 그렇게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구조는 조금씩 느슨해진다.
열등감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나는 그것이 관계의 설계자가 되지 않도록 지켜본다. 친절을 받았을 때 작아지는 대신, 그 친절을 그대로 받는다. 그리고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있을 때는, 계산하지 않고 건넨다. 빚을 갚는 마음이 아니라, 교류하는 마음으로. 내가 완벽해져야만 동등해질 수 있다는 믿음 대신, 지금의 나로도 충분히 나란히 설 수 있다는 감각을 조금씩 쌓아간다.
이 연습은 거창한 변화가 아니라, 반복에 가깝다. 한 번 나를 세워두었다고 해서 영원히 같은 높이에 서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날은 다시 위축되고, 어떤 날은 괜히 더 예민해진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내가 작아진 이유가 상대의 친절 때문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그 시선을 조금씩 조정한다. 상대를 올려다보지도, 내려다보지도 않고, 마주 보는 방향으로.
친절한 사람 앞에서 더 이상 작아지지 않겠다는 다짐은, 사실 나를 크게 만들겠다는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있는 그대로 두겠다는 선택에 가깝다. 부족한 날도, 단단한 날도, 흔들리는 순간도, 모두 같은 높이에서 인정하는 태도. 그렇게 서 있을 때 비로소 관계는 경쟁이 아니라 동행이 된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누군가의 다정함 앞에서 위축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다정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