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이 ‘평가’처럼 느껴질 때
오늘은 칭찬을 많이 해주는 사람 옆에서 오히려 자존감이 낮아진 경험에 대해 이야기 하러 한다.

칭찬은 분명 좋은 말인데, 왜 나는 점점 작아졌을까
칭찬은 보통 긍정의 언어로 분류된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칭찬을 받으면 기뻐해야 한다고 배운다. 칭찬을 해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칭찬을 받으면 감사해야 하며, 칭찬을 싫어하면 이상한 사람이 되는 분위기 속에서 자란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내가 이상한 줄 알았다. 나를 자주 칭찬해주는 사람 옆에서 이상하게 불편해지고, 어딘가 긴장되고, 점점 위축되는 감정을 느꼈을 때 그 감정을 의심한 쪽은 늘 나였다. “이렇게 좋게 말해주는데 왜 기쁘지 않지?” “이 사람은 나를 좋게 봐주는데 왜 나는 편하지 않지?” “내가 자존감이 낮아서 그런가?” 나는 계속 나를 의심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정말로 나를 많이 칭찬했기 때문이다. 사소한 행동에도 “너 진짜 섬세하다”, 작은 성과에도 “너는 역시 다르다”, 평범한 선택에도 “너는 생각이 깊다”고 말해줬다. 처음에는 기분이 좋았다. 누군가가 나를 이렇게 좋게 봐준다는 게 감사했다. 나도 모르게 그 사람 앞에서는 더 잘 보이고 싶어졌고, 더 괜찮은 모습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한 감정이 생겼다. 나는 점점 더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 앞에서 실수하면 안 될 것 같았고, 기대에 못 미치면 실망을 안겨줄 것 같았고, 이전에 들었던 칭찬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 칭찬은 나를 높여주는 말이었지만, 동시에 나를 묶는 말이 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칭찬이 반복되면서 미묘하게 ‘기준’이 생긴다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좋은 말처럼 들렸던 표현들이 점점 나를 평가하는 문장처럼 느껴졌다. “너는 항상 책임감 있잖아”라는 말은 칭찬이지만, 그 말이 반복되면 나는 항상 책임감 있어야 하는 사람이 된다. “너는 진짜 배려심이 깊어”라는 말은 고마운 표현이지만, 그 말이 계속되면 나는 배려하지 않는 순간 나답지 않은 사람이 된다. 칭찬은 나를 특정한 이미지로 고정시킨다. 그리고 그 이미지가 반복될수록 나는 그 틀 안에서만 안전해진다. 틀을 벗어나면 칭찬을 잃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 사람 앞에서 자연스럽게 행동하지 못했다. 내 감정이 먼저가 아니라,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지가 먼저가 되었다.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보다, 이 말이 내 이미지에 맞는지가 중요해졌다. 내가 솔직하게 실망을 표현하기보다, 이 실망이 나의 ‘성숙한 이미지’를 깨지 않을지가 더 중요해졌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나는 칭찬을 받으면서도 점점 나를 잃어가고 있었다.
칭찬이 왜 이런 구조를 만들까. 칭찬은 본질적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그리고 그 시선에는 늘 평가의 요소가 포함된다. 물론 모든 칭찬이 나쁜 건 아니다. 누군가가 나를 인정해주는 건 분명 따뜻한 경험이다. 하지만 칭찬이 반복되고, 관계의 주요한 소통 방식이 되고, 그 사람이 나를 바라보는 거의 유일한 프레임이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가 아니라, ‘칭찬받는 나’로 존재하기 시작한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자존감에는 치명적이다. 자존감은 조건이 없을 때 자란다. 내가 잘해도 괜찮고, 못해도 괜찮고, 빛나도 괜찮고, 평범해도 괜찮다는 감각에서 자란다. 그런데 칭찬이 끊임없이 나를 특정한 장점 위에 올려놓으면, 나는 그 장점을 유지해야만 안전해진다. 그러면 자존감은 성장하는 대신 불안정해진다. 왜냐하면 나는 나 자체가 아니라, 나의 특정한 모습으로만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칭찬을 들을수록 오히려 마음이 조여왔다. 다음에는 뭘 보여줘야 하지, 이번에도 기대에 부응해야 하지, 혹시 이번에는 실망시키지 않을까 같은 생각이 머릿속을 채웠다. 그 사람은 여전히 나를 좋게 말해줬지만, 나는 그 말 속에서 보이지 않는 조건을 읽어내고 있었다. “너는 늘 성실해”라는 말 뒤에는 ‘그러니까 계속 성실해야 해’가 붙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는 감정이 안정적이어서 좋아”라는 말 뒤에는 ‘그러니까 흔들리지 마’가 붙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건 상대가 실제로 그런 의도를 가졌다는 뜻이 아니라, 반복된 칭찬이 만들어낸 내 안의 긴장이었다. 나는 점점 평가받는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다. 시험지를 제출하고 채점 결과를 기다리는 학생처럼, 나는 그 사람의 반응을 기다렸다. 칭찬을 받으면 안도했고, 애매한 반응을 받으면 스스로를 검열했다. 자존감은 올라간 게 아니라, 그 사람의 말에 따라 출렁이는 구조가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깨닫기 시작했다. 칭찬이 많다고 해서 자존감이 자동으로 높아지는 건 아니라는 걸. 오히려 칭찬이 관계의 중심이 될수록, 나는 내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기보다 타인의 평가를 통해 확인하려는 습관이 강해졌다. 그리고 이 습관은 무섭도록 빠르게 나를 약하게 만들었다. 나는 혼자 있을 때보다 그 사람 옆에 있을 때 더 작아졌다. 왜냐하면 혼자 있을 때는 적어도 평가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혼자 있을 때 나는 그냥 나였지만, 그 사람 옆에서는 늘 ‘좋은 나’여야 했다. 그리고 이 차이를 자각하는 순간, 나는 처음으로 인정했다. 나는 칭찬이 불편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칭찬이 평가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불편했다. 그리고 이 불편함은 내가 예민해서가 아니라, 관계의 구조 때문이라는 걸 서서히 이해하게 되었다.
칭찬이 반복될수록 나는 인정받는 사람이 아니라 ‘관리되어야 할 자아’가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기분 좋은 일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좋게 본다는 것, 내가 가진 면을 구체적으로 말해준다는 것, 나를 긍정적인 언어로 설명해준다는 것은 존재가 선명해지는 경험이었다. 사람은 혼자 있을 때보다 타인의 언어 안에서 자신을 더 또렷하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이 건네는 칭찬을 고맙게 받았다. “넌 늘 책임감이 강해.” “넌 쉽게 흔들리지 않아서 좋아.” “넌 참 어른스럽다.” 이런 말들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듯했다. 그런데 칭찬이 반복되면서, 그것은 단순한 격려가 아니라 ‘정의’가 되기 시작했다. 정의는 힘이 있다. 한 번의 말은 스쳐 지나가지만, 여러 번 반복된 말은 이미지가 되고, 이미지는 정체성을 구성한다. 나는 어느 순간 그 사람이 말해온 문장들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 문장 안에서 나를 움직이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관계는 조용히 구조를 바꾼다. 칭찬은 겉으로는 수평적인 언어 같지만, 실제로는 미묘한 방향성을 가진다. 칭찬을 하는 사람은 해석하는 위치에 서 있고, 칭찬을 받는 사람은 해석되는 위치에 선다. 해석은 기준을 전제로 한다. 기준을 가진 쪽은 위에 서 있고, 기준에 맞춰지는 쪽은 아래에 선다. 물론 이 위아래는 노골적이지 않다. 그래서 더 교묘하다. 나는 그 사람이 나를 억압한다고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감사했고, 호의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반복되는 해석 속에서 나는 점점 ‘정의된 사람’이 되었다. 정의된 사람은 자유롭지 않다. 왜냐하면 이미 설명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넌 성숙해”라는 말은 칭찬이지만, 동시에 미숙함을 허용하지 않는 문장이 된다. “넌 안정적이야”라는 말은 격려지만, 동시에 흔들림을 드러내기 어렵게 만드는 틀이다. 이때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내가 느끼는 날것의 감정을 그대로 보여줄 것인가, 아니면 이미 형성된 이미지에 맞게 다듬을 것인가. 대부분의 경우 나는 후자를 택했다. 왜냐하면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망을 주고 싶지 않았고, 기대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고, ‘예전 같지 않다’는 평가를 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나를 조정했다. 조정은 거창하지 않다. 불편한 말을 삼키고, 피곤함을 줄여 표현하고, 상처를 가볍게 넘기고, 감정을 정리된 형태로만 드러내는 것. 이 작은 조정이 반복되면서 나는 점점 더 ‘관리되는 자아’가 되었다. 관리된 자아는 효율적이다. 관계 안에서 갈등을 최소화하고, 기대를 충족시키고, 안정적인 인상을 준다. 하지만 관리된 자아는 소모적이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자기 점검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점점 나의 감정보다 그 사람의 반응을 먼저 떠올렸다. 내가 지금 보이는 모습이 기대에 부합하는지, 내가 말한 문장이 이미지와 어긋나지 않는지, 내가 약해 보이면 관계의 균형이 흔들리지 않을지 계산했다. 이 계산은 습관이 되었고, 습관은 구조가 되었다. 나는 나를 느끼기 전에 나를 해석했다. 자존감은 원래 ‘내가 나를 받아들이는 힘’에서 자라야 하는데, 나는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통해 나를 확인하고 있었다. 이때 자존감은 내부 기반을 잃고 외부 반응 위에 세워진다. 겉으로는 인정받는 상태지만, 실은 매우 취약한 상태다. 왜냐하면 외부 반응은 언제든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칭찬이 줄어들거나, 톤이 달라지거나, 기대에 못 미쳤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나는 과하게 흔들렸다. 내가 실제로 잘못했는지보다, 이미지가 손상되었는지가 더 크게 다가왔다. 나는 나의 본질이 아니라, 나의 평가 상태를 걱정했다. 이 지점에서 정체성은 분열된다. 한쪽에는 실제의 나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관리된 나가 있다. 실제의 나는 지치고, 흔들리고, 때로는 유치하고, 때로는 이기적이다. 하지만 관리된 나는 늘 침착하고, 배려심 있고, 성숙하다. 나는 점점 관리된 나로 더 오래 머물게 되었고, 실제의 나는 점점 관계 밖으로 밀려났다. 문제는 실제의 나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억눌린 감정은 다른 형태로 새어나온다. 이유 없이 예민해지거나, 사소한 반응에 과하게 상처받거나, 혼자 있을 때 갑자기 무기력해진다. 나는 겉으로는 칭찬받는 사람이었지만, 내면에서는 점점 위축되고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나로 인정받는 게 아니라, 특정한 상태로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태는 유지해야 한다. 유지되지 않으면 무너진다. 그래서 나는 더 애썼다. 더 단단해 보이려고, 더 흔들리지 않으려고, 더 실망을 주지 않으려고. 그러나 애씀은 자유가 아니다. 애씀은 긴장이다. 긴장이 지속되면 자존감은 단단해지지 않고 경직된다. 나는 높이 평가받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 높이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내려오는 순간, 내가 별것 아닌 사람이 될 것 같았고, 관계의 온도가 식을 것 같았고, 내가 사랑받는 이유가 사라질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계속 ‘괜찮은 상태’를 유지했다. 하지만 인간은 상태가 아니라 존재다. 존재는 변하고 흔들리고 때로는 무너진다. 그 흔들림이 허용되지 않을 때, 자존감은 성장하지 못한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느낀 위축감은 칭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칭찬이 만들어낸 자리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는 동등하게 마주 보는 사람이 아니라, 계속해서 좋은 모습을 증명해야 하는 위치에 서 있었다. 칭찬은 나를 존중하는 말이었지만, 반복 속에서 그것은 나를 고정시키는 장치가 되었다. 나는 인정받고 있었지만 자유롭지 않았고, 높이 평가받고 있었지만 안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순이 쌓이면서 자존감은 조용히 외부로 이양되었다. 나는 나를 믿기보다, 나를 바라보는 눈을 먼저 의식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보였다. 내가 원했던 건 칭찬이 아니라, 관리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였다는 것을.그리고 이 구조가 더 위험해지는 이유는, 이 관계가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정상적’이고 ‘좋은 관계’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누군가가 나를 함부로 대하지도 않았고, 무례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항상 나를 존중하는 말만 골라서 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느끼는 불편함을 스스로 부정하게 된다. “이 정도 칭찬도 불편하면 내가 예민한 건가?” “이렇게까지 나를 좋게 봐주는데 내가 문제를 만드는 건 아닐까?” 이런 질문이 반복되면서, 나는 관계를 의심하기보다 나 자신의 감각을 의심하게 된다. 이때 자존감은 또 한 번 흔들린다. 왜냐하면 자존감이란 결국 ‘내가 느끼는 감각을 신뢰하는 힘’인데, 나는 점점 내 감각보다 관계의 겉모습을 더 신뢰하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이 구조는 책임감이 강하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더 깊게 빠진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상대가 나에게 이렇게까지 잘해주는데”라는 생각을 쉽게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칭찬은 감사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감사는 침묵을 낳는다. 나는 불편해도 말하지 않는다. 말하는 순간 내가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될 것 같고, 고마움을 배신하는 사람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편함은 말로 나오지 못하고, 내 안에서만 쌓인다. 말해지지 않은 감정은 해소되지 않는다. 대신 형태를 바꾼다. 이유 없는 피로, 관계 후의 공허함, 혼자 있을 때의 무기력, 사소한 말에 과하게 움츠러드는 반응으로 나타난다. 나는 점점 더 관계 안에서 나를 줄인다. 더 조심하고, 더 맞추고, 더 깎는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건, 칭찬을 하는 사람 역시 자신이 위에 서 있다고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그 사람은 진심으로 나를 존중하고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존중과 동등함은 다르다. 존중은 여전히 거리 위에서 가능하지만, 동등함은 같은 높이에서만 가능하다. 칭찬이 일방적으로 흐를 때, 관계는 자연스럽게 위아래를 만든다. 한쪽은 해석하는 사람, 다른 한쪽은 해석되는 사람. 이때 칭찬을 받는 사람은 점점 스스로를 설명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이미 설명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는 사실 요즘 좀 불안해”라고 말하는 대신, “괜찮아”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안정적인 사람’으로 정의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건 나한테 좀 버거워”라고 말하고 싶지만, “할 수 있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나는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불려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과 감정이 어긋나는 순간이 반복되면, 사람은 자기 자신을 두 겹으로 살게 된다. 겉으로 드러나는 나와, 안에서 느끼는 내가 분리된다. 이 분리는 서서히 자존감을 갉아먹는다. 왜냐하면 자존감은 ‘내가 느끼는 것과 내가 말하는 것이 일치할 때’ 가장 안정적으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나는 점점 내 감정을 정확히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감정을 표현할 자리가 없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나는 묘한 열등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상대는 늘 여유 있고, 흔들림 없어 보이고, 나는 그 사람의 시선 안에서 계속 다듬어져야 하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이 열등감은 상대가 나보다 뛰어나서 생기는 게 아니다. 관계 안에서 내가 항상 ‘검증받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생긴다. 나는 평가받고 있지만, 상대는 평가받지 않는다. 이 비대칭이 계속되면, 아무리 칭찬을 받아도 나는 스스로를 온전히 존중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존중은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같은 자리에서 교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관계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계기는 아주 사소한 깨달음이었다. 내가 불편함을 느낄 때마다 “그래도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이잖아”라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이었다. 좋은 사람이라는 말이, 어느새 나의 감각을 무효화하는 도구가 되어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질문하게 되었다. “이 관계에서 나는 편한가?” “나는 이 사람 앞에서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가?” “나는 여기서 유지되지 않아도 괜찮은가?” 이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답하지 못하는 순간,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원했던 건 더 많은 칭찬이 아니라, 더 적은 관리였다는 것을. 더 높은 평가가 아니라, 평가가 필요 없는 관계였다는 것을. 자존감은 누군가가 나를 계속 좋게 말해줄 때 자라는 게 아니라, 내가 나의 불완전한 상태로도 안전하다고 느낄 때 자란다. 그리고 그 안전함은, 칭찬의 양이 아니라 동등한 위치에서 만들어진다. 나는 그제야 이해했다. 칭찬이 문제였던 게 아니라, 칭찬만 오가고 솔직함이 오가지 않았던 구조가 문제였다는 것을. 그리고 그 구조를 인식한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좋은 사람으로 유지되기 위해’ 나를 깎지 않기로 했다. 그 선택이야말로, 내가 나에게 돌려준 첫 번째 존중이었다.
자존감은 칭찬으로 세워지는 구조물이 아니라, 평가가 멈춘 자리에서 숨을 쉬는 감각이다
나는 한동안 자존감이 높다는 말의 의미를 착각하고 있었다. 자존감이 높다는 건 누군가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상태, 인정받는 상태, 칭찬이 끊이지 않는 상태라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칭찬이 많은 관계를 건강한 관계라고 여겼고, 그 안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왜 이렇게까지 인정받는데도 나는 편하지 않을까, 왜 이렇게까지 좋게 말해주는데도 나는 계속 긴장하고 있을까, 왜 나는 늘 괜찮은 사람처럼 행동해야 할 것 같을까. 이 질문의 답을 찾는 데 오래 걸렸다. 자존감은 ‘높이’의 문제가 아니라 ‘기준의 위치’ 문제라는 걸 깨닫기까지 말이다. 내가 흔들렸던 이유는 칭찬이 많아서가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기준이 내 안이 아니라 관계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점점 나 자신을 느끼기보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상상하며 살고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어떻게 정의했는지, 어떤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는지, 어떤 기대를 품고 있는지를 먼저 떠올리고 나서야 행동했다. 이건 겉으로는 성숙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감각의 위임이다. 나는 나를 스스로 판단하는 대신, 타인의 해석을 통해 나를 확인하고 있었다. 자존감은 원래 내가 나를 신뢰하는 힘이어야 하는데, 나는 점점 나를 신뢰하기보다 ‘좋게 봐주는 사람의 판단’을 신뢰하고 있었다. 이 구조는 겉으로는 부드럽지만, 안에서는 아주 미묘한 권력을 만든다. 칭찬하는 사람은 해석하는 위치에 서 있고, 칭찬받는 사람은 해석되는 위치에 선다. 물론 그 권력은 의도된 것이 아니다. 선의에서 시작된 말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관계에서 위치는 의도와 무관하게 작동한다. 나는 점점 ‘나를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설명되는 사람’이 되었고, 설명되는 사람은 항상 자기 자신을 한 발 물러나 바라보게 된다. 나는 지금 이 모습이 괜찮은가, 기대에 맞는가, 이전과 일관되는가를 끊임없이 점검했다. 이 점검이 습관이 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법을 잊어갔다. 자존감은 자연스러움 위에 세워지는데, 나는 점점 관리 위에 나를 세우고 있었다. 관리된 자아는 안전해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불안정하다. 왜냐하면 그 상태는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유지가 멈추는 순간, 관계가 흔들릴 것 같은 두려움이 따라온다. 그래서 나는 더 애썼다. 더 흔들리지 않으려고, 더 단단해 보이려고, 더 기대에 부응하려고. 그러나 애씀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나는 인정받으면서도 점점 지쳤다. 그리고 그 지침은 나를 탓하는 방향으로 흘렀다. “왜 나는 이것도 편하게 못 받아들일까.” “왜 이렇게까지 칭찬을 받는데도 만족하지 못할까.” 나는 관계를 의심하기보다 나 자신을 의심했다. 이때 자존감은 이중으로 흔들린다. 하나는 외부 기준에 의존하는 구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 구조를 문제 삼지 못하고 스스로를 비난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제야 이해했다. 내가 원했던 건 더 높은 평가가 아니라, 평가 자체가 멈추는 순간이었다는 걸. 나는 누군가가 나를 계속 좋게 말해주는 것보다, 내가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은 관계를 원했다. 내가 실수해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 내가 지쳐도 이유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 내가 어제와 다르게 행동해도 이미지가 무너지지 않는 자리. 자존감은 그 자리에서 자란다. 내가 잘할 때가 아니라, 잘하지 못할 때 배제되지 않는 경험에서. 내가 강할 때가 아니라, 약할 때 밀려나지 않는 경험에서. 그리고 이걸 깨닫는 순간부터 나는 관계를 바라보는 기준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 사람이 나를 얼마나 좋게 말해주는지가 아니라, 내가 이 사람 앞에서 얼마나 자연스러운지를 보기 시작했다. 나는 이 사람 앞에서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이 사람 앞에서 질투를 솔직히 인정할 수 있는가, 나는 이 사람 앞에서 실망했다고 말해도 관계가 무너지지 않는가. 이런 질문이 자존감의 기준이 되었다. 자존감은 누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따라 오르내리는 수치가 아니라, 내가 나의 감정을 그대로 두어도 안전한 경험의 축적이다. 그리고 그 안전함은 타인이 나를 높이 세워줄 때가 아니라, 나를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볼 때 생긴다. 나는 이제 칭찬이 불편해질 때 그 감각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 불편함은 내가 예민해서가 아니라, 내가 나를 잃고 있다는 신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존감은 나를 높이는 기술이 아니라, 나를 잃지 않는 태도다. 누군가의 언어 위에 나를 올려두는 대신, 내가 나를 내려놓지 않는 선택. 그 선택이 반복될 때 비로소 나는 느낀다. 자존감은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되찾아지는 것이라는 걸. 그리고 그 되찾음은 거창하지 않다. 오늘 내가 기대에 못 미쳤어도 나를 깎지 않는 것, 오늘 내가 흔들렸어도 나를 설명하려 애쓰지 않는 것, 오늘 내가 평범했어도 스스로를 작게 만들지 않는 것. 그 작은 태도들이 쌓이면서 나는 조금씩 안으로 돌아온다. 더 이상 누군가의 시선 위에 서 있지 않고, 나의 감각 위에 선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야 비로소 숨이 깊어진다. 자존감은 칭찬의 크기로 자라는 게 아니라, 평가가 멈춘 고요함 속에서 천천히 뿌리내리는 감각이라는 걸, 나는 이제야 이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