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이 부담으로 변하는 과정
오늘은 그사람은 늘 나를 배려했는데,나는 계속 미안해진 내용에 대해 이야기 하러 해.

“고마움”으로 시작한 감정이 어느 순간 “미안함”으로 바뀌기까지
처음에는 정말 고마웠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나서 “아, 세상에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말투가 부드럽고, 질문이 세심하고, 상대가 불편할까 봐 먼저 챙겨주고, 내 말이 끝날 때까지 끊지 않고 들어주고,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그 말이 틀리지 않다고 말해주고, 심지어 내가 스스로를 깎아내릴 때조차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먼저 풀어졌다. 사람에게 마음이 풀어진다는 건 생각보다 큰 사건이다. 특히 늘 긴장 속에서 살아온 사람에게는 더 그렇다. 누군가가 내 주변을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순간, 나는 그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기대게 된다. 그런데 그 기대는 생각보다 빠르게 깊어진다. 왜냐하면 친절은 의외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친절은 공격이 아니고, 위협이 아니고, 요구가 아니고, 강요도 아닌데도 사람을 묶어버린다. 그것도 아주 조용히. 상대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데, 내가 먼저 스스로를 조정하게 만든다. “이 사람은 이렇게까지 해주는데 나는 뭐지?”라는 생각이 아주 작게 시작된다. 그리고 그 생각은 처음에는 미세한 울림 정도로만 존재한다. 나는 그것을 죄책감이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그냥 고마움의 다른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고마우니까 나도 잘해야지, 고마우니까 나도 더 신경 써야지, 고마우니까 나도 더 따뜻하게 대해야지. 이렇게 생각하는 건 자연스럽다. 사실 인간은 받기만 하는 상태를 오래 견디지 못한다. 받기만 하면 마음이 불편해지고, 불편해지면 그 불편을 해결하기 위해 무언가를 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그 친절을 받으면서도 그 친절을 갚으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갚음이 ‘내가 하고 싶은 만큼’이 아니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도 아니라는 데 있었다. 그 갚음은 ‘상대의 친절에 맞먹는 수준’으로 올라가려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관계는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여전히 다정하고, 여전히 부드럽고, 여전히 배려 깊은 관계였지만, 내 안에서는 관계가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상대는 계속 친절했고, 나는 계속 그 친절을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나는 상대처럼 친절할 수 없었다. 내가 상대를 덜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상대를 소중히 여기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단지 나는 상대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상대만큼의 에너지가 없었다. 상대만큼의 감정적 공간이 없었다. 상대만큼의 안정감이 없었다. 그런데 친절한 사람 옆에서는 이런 차이가 너무 선명하게 드러난다. 상대가 나를 평가하지 않는데도, 나는 스스로를 평가하게 된다. 상대가 나를 재촉하지 않는데도, 나는 스스로를 재촉하게 된다. 상대가 내 부족함을 지적하지 않는데도, 나는 내 부족함을 더 크게 느끼게 된다. 이게 친절이 가진 이상한 힘이다. 친절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사람을 더 초라하게 만든다. 특히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친절을 받으면, 그 친절은 따뜻함이 아니라 거울이 된다. 그 거울은 상대의 좋은 마음을 비추는 동시에, 내 안의 부족함을 더 크게 비춘다.
나는 그 사람이 나를 챙길 때마다 처음에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구나.” 그런데 그 따뜻함은 어느 순간부터 긴장으로 바뀌었다. 따뜻함이 긴장으로 바뀌는 순간은 대체로 비슷한 형태로 찾아왔다. 예를 들어 상대가 내 스케줄을 먼저 배려해줬을 때, 나는 고마우면서도 마음 한쪽이 무거워졌다. “이렇게까지 맞춰주면 나는 뭘 해야 하지?” 상대가 내가 좋아하는 걸 기억해두고 챙겨줬을 때, 나는 감동하면서도 동시에 불편했다. “나는 저 사람을 위해 이렇게까지 해본 적이 있나?” 상대가 내가 힘든 이야기를 꺼냈을 때 조용히 들어주고, 섣부른 조언 대신 내 감정을 인정해줬을 때, 나는 울컥하면서도 동시에 작아졌다. “나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들어준 적이 있나?” 친절을 받을수록 나는 상대를 더 좋아하게 됐고, 상대를 더 좋아할수록 나는 더 불안해졌다. 왜냐하면 상대가 소중해질수록, 그 관계를 잃을까 봐 두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느끼는 두려움은 ‘상대가 나를 떠날까 봐’가 아니라 ‘내가 상대에게 부족한 사람이 될까 봐’였다. 나는 상대가 나를 싫어할까 봐 두려워한 게 아니라, 내가 상대의 친절을 감당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했다. 이건 정말 이상한 감정이다. 보통 우리는 관계에서 상처를 받을까 봐 두려워한다. 그런데 나는 상처가 아니라 친절이 두려웠다. 친절은 따뜻한데, 그 따뜻함이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 따뜻함에 걸맞은 사람이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감정이 결코 “상대가 나쁜 사람이라서” 생긴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상대가 너무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생겼다. 상대가 애매하게 굴었다면, 상대가 계산적으로 굴었다면, 상대가 가끔은 차갑고 가끔은 따뜻한 사람이라면, 나는 이런 감정을 덜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상대는 일관되게 친절했다. 일관된 친절은 안정감을 주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압박이 된다. 특히 내면에 ‘나는 충분하지 않다’는 믿음이 깊게 깔려 있는 사람에게는 그렇다. 나는 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받으려면, 누군가에게 인정받으려면,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으려면, 끊임없이 뭔가를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친절을 받는 순간, 나는 그 친절을 ‘무상으로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그 친절을 ‘언젠가 갚아야 할 빚’으로 받아들였다. 이게 문제의 시작이었다. 친절이 빚으로 느껴지는 순간, 관계는 더 이상 편안한 공간이 아니다. 관계는 계산이 된다. 상대는 계산하지 않는데, 나 혼자 계산을 시작한다. 상대는 요구하지 않는데, 나 혼자 스스로에게 요구를 한다. 상대는 부담을 주지 않는데, 나 혼자 부담을 만든다. 그리고 이 부담은 시간이 갈수록 커진다. 왜냐하면 친절한 사람은 계속 친절하기 때문이다. 친절이 계속 쌓이면, 그 친절을 갚아야 한다는 내 강박도 계속 쌓인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나는 그 사람을 만나기 전부터 이미 지친다. 만나기 전부터 ‘오늘은 내가 뭘 해줘야 하지?’라는 생각이 든다. 만나기 전부터 ‘오늘은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처럼 보여야 하지?’라는 생각이 든다. 만나기 전부터 ‘오늘은 내가 얼마나 감사한 태도를 보여야 하지?’라는 생각이 든다. 이건 사랑이 아니다. 이건 관계가 아니라 수행이다. 그리고 관계가 수행이 되는 순간, 친절은 따뜻함이 아니라 부담이 된다.
나는 그 사람이 내게 “너는 그냥 있어도 돼”라고 말해줄 때마다, 오히려 더 불편해졌다. 왜냐하면 나는 ‘그냥 있는 나’를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그냥 있으면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냥 있으면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상대가 “그냥 있어도 돼”라고 말하면, 나는 그 말을 믿는 대신 그 말에 맞는 사람이 되려고 했다. “그냥 있어도 괜찮은 사람처럼” 행동하려고 했다. 이게 얼마나 아이러니한지 모른다. 상대는 나를 편하게 해주려고 했는데, 나는 그 편안함을 얻기 위해 또 다른 형태의 노력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친절은 진짜로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친절은 내게 휴식이 아니라 숙제가 되었다. 친절을 받으면 따뜻해지는 게 아니라, “나는 이제 뭘 해야 하지?”라는 압박이 생겼다. 그리고 그 압박은 시간이 갈수록 더 커졌다.
특히 나는 친절한 사람 앞에서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했다. 내가 원래 나쁜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나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잘해주고 싶고, 나도 누군가를 챙기고 싶고, 나도 누군가를 소중히 여기고 싶다. 하지만 나는 완벽하게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도 피곤하면 말이 짧아지고, 나도 여유가 없으면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나도 가끔은 이기적이고, 나도 가끔은 상대의 감정을 놓친다. 이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다. 그런데 친절한 사람 앞에서는 이 평범함이 허락되지 않는 느낌이 든다. 상대는 나에게 평범함을 허락해준다. 하지만 내가 나에게 평범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상대가 너무 다정하면, 나는 내가 조금만 무심해져도 죄책감을 느낀다. 상대가 너무 배려하면, 나는 내가 조금만 솔직해져도 미안해진다. 상대가 너무 착하면, 나는 내가 조금만 이기적이어도 내가 쓰레기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더 조심하게 된다. 더 신경 쓰게 된다. 더 긴장하게 된다. 그리고 그 긴장은 결국 관계를 망가뜨린다. 왜냐하면 관계는 긴장으로 유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관계는 편안함으로 유지된다. 관계는 솔직함으로 유지된다. 관계는 완벽함이 아니라 불완전함을 서로 허락하는 힘으로 유지된다. 그런데 나는 친절한 사람 앞에서 불완전함을 허락하지 못했다. 나는 스스로를 너무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그 묶임이 결국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아픈 건, 상대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사실이다. 상대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 괴로웠다. 상대가 나쁜 사람이었다면, 나는 관계를 끊는 것이 덜 죄책감이었을 것이다. 상대가 상처를 줬다면, 나는 떠나는 것이 덜 미안했을 것이다. 그런데 상대는 상처를 주지 않았다. 상대는 오히려 나를 지켜줬다. 그래서 나는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었다. 떠나면 내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떠나면 내가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떠나면 내가 인간관계를 망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더 버텼다. 더 참았다. 더 노력했다. 더 잘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노력은 관계를 더 좋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더 지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내가 지칠수록, 나는 그 사람을 만나는 것이 점점 더 부담스러워졌다. 부담스러워지면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게 된다. 거리를 두면 상대는 “왜 요즘 힘들어 보여?” “무슨 일 있어?”라고 묻는다. 그 질문은 다정하지만, 나는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힘든 이유는 상대가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상대가 너무 좋은 사람이어서였기 때문이다. 이건 말로 설명하기가 너무 어렵다. “너가 너무 친절해서 내가 힘들어”라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 말을 하는 순간, 나는 상대의 친절을 부정하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나는 침묵했다. 그리고 침묵은 관계를 더 어색하게 만들었다.
이때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좋은 관계가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좋은 사람과 좋은 관계는 다른 문제라는 걸. 좋은 사람은 인격의 문제지만, 좋은 관계는 구조의 문제다. 관계는 두 사람의 성격이 아니라, 두 사람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상호작용이 어느 순간 한쪽에게 부담이 되면,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관계는 힘들어진다. 나는 그 관계에서 ‘친절’이 구조적으로 나를 압박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걸 늦게 깨달았다. 그때까지 나는 내 감정을 내가 이상해서 생긴 문제라고 생각했다.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사람 앞에서 불편해하지?” “나는 왜 이렇게 감사함을 못 느끼지?” “나는 왜 이렇게 다정함을 부담스러워하지?”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내 감정을 부끄러워했다. 그런데 지금은 말할 수 있다. 그 감정은 이상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인간적인 감정이었다. 내가 느낀 건 ‘친절이 싫다’가 아니라, ‘친절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감각이었다. 그리고 그 감각은 내가 약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나는 늘 스스로를 증명해야 했고, 늘 뭔가를 해야 했고, 늘 누군가에게 인정받아야 했고, 늘 내가 부족하다고 느끼며 살았다. 그런 사람이 누군가의 무조건적인 친절을 받으면, 그 친절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공포가 된다. 축복은 내가 원하던 것이지만, 공포는 내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절이 부담으로 변하는 과정은, 사실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내 내면의 구조가 드러나는 과정이기도 했다. 나는 그 관계를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됐다. 나는 친절을 받으면 편안해지는 사람이 아니라, 친절을 받으면 갚아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이었다. 나는 사랑을 받으면 안정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받으면 불안해지는 사람이었다. 나는 누군가가 나를 배려하면 기뻐하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배려하면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이 사실은 나를 슬프게 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삶에서 친절이 늘 부족하다고 느껴왔기 때문이다. 나는 늘 누군가의 따뜻함을 원했고, 누군가의 이해를 원했고, 누군가의 다정함을 원했다. 그런데 막상 그것을 받았을 때, 나는 그것을 편안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그 따뜻함을 즐기지 못했다. 나는 그 친절을 그대로 품지 못했다. 나는 그 친절을 빚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빚이 나를 무겁게 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결국 한 가지를 깨달았다. 내가 미안해졌던 이유는, 그 사람이 나를 배려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내가 나를 배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걸. 내가 나를 배려하지 않는 사람은, 남의 배려를 받으면 더 불편해진다. 내가 나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남의 존중을 받으면 더 어색해진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남의 사랑을 받으면 더 불안해진다. 왜냐하면 내 안의 기준과 상대의 태도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상대는 “너는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내 안에서는 “나는 부족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두 목소리가 싸우기 시작하면, 관계는 편안할 수 없다. 나는 그 싸움 속에서 계속 미안해졌다. 그리고 그 미안함은 결국 관계를 압박했다.
친절이 ‘관계의 온도’가 아니라 ‘관계의 규칙’이 되어버렸을 때
그 사람의 친절은 처음엔 온도였다. 따뜻한 말, 배려 깊은 행동, 내가 불편할까 봐 먼저 살피는 태도. 그런 것들은 관계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고, 서로를 안전하게 만든다. 친절은 원래 그런 역할을 한다. 그런데 친절이 반복되면, 친절은 더 이상 단순한 온도가 아니라 ‘규칙’이 된다. 관계의 기본값이 된다. 처음에는 “와, 이런 사람도 있구나”였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 “이 사람은 원래 이런 사람이니까”로 바뀐다. 그리고 이 순간부터 친절은 그 사람의 장점이 아니라, 관계 전체의 기준이 된다. 그 기준은 겉으로는 너무 좋은 기준이다. 친절한 관계, 배려하는 관계, 서로 상처 주지 않는 관계. 누구나 원하는 관계처럼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기준이 ‘모든 순간’에 적용되기 시작할 때 생긴다. 인간은 늘 친절할 수 없다. 인간은 늘 여유로울 수 없다. 인간은 늘 성숙할 수 없다. 인간은 늘 다정할 수 없다. 인간은 때때로 피곤하고, 때때로 예민하고, 때때로 자기중심적이고, 때때로 감정이 넘친다. 그런데 관계의 규칙이 친절로 굳어버리면, 이 자연스러운 인간성이 허락되지 않는 느낌이 생긴다. 정확히 말하면, 상대는 허락하지만 내가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그 허락하지 못함 때문에 점점 더 관계 안에서 숨이 막히게 된다.
나는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내가 원래 가진 감정의 폭을 줄이기 시작했다. 원래의 나는 기분이 좋으면 확 웃고, 기분이 안 좋으면 얼굴에 티가 나고, 힘들면 말이 줄어들고, 서운하면 서운하다고 말하고, 화가 나면 짜증이 조금 섞인 말투가 나오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완벽하게 성숙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이런 평범함이 점점 줄어들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너무 친절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늘 좋은 말만 했고, 늘 부드러운 태도를 유지했고, 늘 상대의 감정을 먼저 고려했다. 그 사람은 내 감정이 상하지 않게, 내 기분이 무너지지 않게, 내가 불편해지지 않게 관계를 조심스럽게 다뤘다. 그리고 나는 그걸 보면서, 내가 평범한 인간으로 존재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내가 예민해지면 내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았고, 내가 피곤하다고 말하면 내가 감사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았고, 내가 무심하게 굴면 내가 배려 없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친절한 사람 앞에서만’ 더 성숙한 사람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건 칭찬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성숙이 아니다. 이건 긴장이다. 이건 자기검열이다. 이건 감정의 억압이다. 이건 관계가 아니라 역할극이다. 그리고 역할극은 오래 갈 수 없다. 처음에는 할 수 있다. 오히려 처음에는 그 역할극이 나를 더 좋은 사람처럼 만들어주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역할극은 나를 말라가게 만든다. 왜냐하면 역할극은 내 진짜 감정을 내 안에 가둬두기 때문이다.
친절이 규칙이 되면,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작은 불편과 마찰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관계는 원래 마찰이 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어도, 아무리 좋은 사람이어도, 두 사람이 만나면 서로의 리듬이 다르기 때문에 마찰이 생긴다. 그런데 친절이 규칙이 되어버린 관계에서는 마찰이 생기는 순간, 그 마찰이 단순한 마찰로 끝나지 않는다. 마찰은 곧바로 죄책감이 된다. “내가 왜 이랬지?” “내가 왜 이렇게 말했지?” “내가 너무 예민했나?” “내가 감사하지 않았나?” 이런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돌아간다. 그리고 그 질문들은 결국 한 가지 결론으로 모인다. “내가 잘못했다.” 친절한 관계에서는 싸움이 적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싸움이 적다는 것은, 항상 건강하다는 뜻이 아니다. 싸움이 적은 대신, 한쪽이 계속 자기 안에서 싸우고 있을 수도 있다. 나는 그랬다. 겉으로는 싸움이 없었다. 우리는 서로를 존중했고,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서로에게 다정했다. 하지만 내 안에서는 계속 싸움이 있었다. 내가 느끼는 불편함과, 내가 그 불편함을 느끼면 안 된다는 생각이 계속 싸웠다. “나는 지금 부담스러워”라는 감정과 “부담스러워하면 안 돼,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이잖아”라는 생각이 싸웠다. 이 싸움이 반복되면 사람은 결국 지친다. 그리고 지치면 관계를 피하고 싶어진다. 그런데 피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순간, 나는 또 미안해졌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피하지 못했다. 대신 더 노력했다. 더 친절하게 행동하려고 했고, 더 다정하게 말하려고 했고, 더 감사한 태도를 보여주려고 했다. 그리고 이 노력은 관계를 더 좋아지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관계를 더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친절은 노력으로 만들어지면, 자연스러운 온도가 아니라 ‘의무’가 되기 때문이다.
친절한 사람 옆에서 내가 계속 미안해졌던 이유는, 결국 관계가 나에게 “너는 계속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무언의 규칙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 규칙은 상대가 만든 게 아니었다. 내가 만들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규칙이 만들어진 배경에는 상대의 친절이 있었다는 점이다. 상대의 친절은 내가 만든 규칙의 재료가 되었다. 상대는 나를 편하게 하려고 친절했지만, 나는 그 친절을 통해 “나는 이 사람에게 실망을 주면 안 된다”는 규칙을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그 규칙은 시간이 갈수록 더 강해졌다. 왜냐하면 관계가 깊어질수록, 내가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커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냥 좋은 사람을 만난 기쁨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은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고,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중요한 사람이 될수록, 나는 그 사람에게 더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그리고 그 욕망은 결국 나를 긴장시켰다.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욕망은 사실 굉장히 위험하다. 사랑은 “있는 그대로의 나”로도 가능해야 한다. 하지만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욕망이 강해지면, 사랑은 “있는 그대로의 나”가 아니라 “좋은 사람인 나”로만 가능해진다. 그 순간부터 관계는 조건이 된다. 그리고 조건이 있는 사랑은 결국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이 관계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지점은, 상대는 정말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상대는 내가 피곤한 날에도 이해했을 것이고, 내가 예민한 날에도 괜찮다고 했을 것이고, 내가 무심하게 굴어도 크게 상처받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그 가능성을 믿지 못했다. 나는 상대의 친절을 믿지 못한 게 아니라,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관계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 친절한 사람은 보통 상대를 압박하려고 친절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대가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친절은 압박이 된다. 이 압박은 상대의 의도가 아니라, 받는 사람의 경험에서 나온다. 나는 어릴 때부터 뭔가를 받으면 갚아야 한다고 배웠고, 누군가가 나에게 잘해주면 그만큼 더 잘해야 한다고 배웠고, 사랑을 받으면 그 사랑을 증명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래서 나는 친절을 받을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 친절이 편안함이 아니라 빚이 되었고, 빚은 나를 더 무겁게 만들었다. 이 무게가 쌓이면, 관계는 결국 ‘좋은 관계’가 아니라 ‘무거운 관계’가 된다. 아무리 따뜻해도, 무거운 관계는 오래 지속하기 어렵다.
그리고 친절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또 하나의 현실적인 문제는, 그 친절이 ‘상대의 기본값’이라는 점이다. 상대는 친절이 습관이고, 친절이 성격이고, 친절이 삶의 방식이다. 그래서 상대는 친절을 주면서도 크게 힘들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친절이 습관이 아니라 노력에 가까웠다. 나는 친절을 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했고, 여유가 필요했고, 감정의 공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상대는 그걸 자연스럽게 했다. 그래서 나는 더 초라해졌다. “왜 나는 저렇게 못 하지?” “왜 나는 저렇게 여유롭지 못하지?” “왜 나는 저렇게 다정하지 못하지?” 이 질문들은 결국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불안해질수록, 나는 더 노력했다. 하지만 노력은 친절을 흉내낼 수는 있어도, 친절의 본질을 만들지는 못한다. 친절의 본질은 여유에서 나온다. 친절의 본질은 안정감에서 나온다. 친절의 본질은 ‘내가 충분하다’는 감각에서 나온다. 나는 그 감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친절을 흉내냈고, 흉내내는 동안 나는 더 지쳤다.
친절한 사람 옆에서 내가 초라해졌던 건, 결국 그 사람의 친절이 나를 평가해서가 아니라, 그 친절이 내 안의 결핍을 더 선명하게 비춰줬기 때문이다. 나는 그 관계를 통해 내가 어떤 결핍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됐다. 내가 얼마나 인정받고 싶어 하는지, 내가 얼마나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어 하는지, 내가 얼마나 사랑을 빚으로 느끼는지, 내가 얼마나 ‘받는 것’을 어려워하는지, 내가 얼마나 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는지. 친절한 사람은 내 결핍을 지적하지 않았지만,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내 결핍을 드러냈다. 그래서 나는 계속 미안해졌다. 미안함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내 안의 구조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결국 나는 어느 순간, 이 관계가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나를 더 불안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이 인정은 정말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통 “좋은 사람과의 관계는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좋은 사람과의 관계도 나를 망가뜨릴 수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관계의 구조가 나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관계는 맞아야 한다. 사람의 인격이 좋다고 해서 관계가 자동으로 맞는 건 아니다. 어떤 관계는 서로의 장점을 극대화한다. 하지만 어떤 관계는 한쪽의 장점이 다른 쪽에게 압박이 된다. 친절이 압박이 되는 관계가 바로 그렇다. 나는 그 관계에서 친절을 사랑했지만, 동시에 친절을 두려워했다. 친절을 원했지만, 친절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모순이 나를 계속 미안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제 이 관계를 돌아보면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사람은 왜 그렇게 친절했을까?” “그 사람의 친절은 정말로 나를 위한 것이었을까?” 이 질문은 상대를 의심하는 질문이 아니다. 친절의 구조를 이해하는 질문이다. 친절은 때때로 상대를 위한 것이지만, 때때로 친절을 주는 사람 자신을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친절은 상대를 편하게 해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친절을 주는 사람이 관계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방식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친절함으로 관계를 유지한다. 어떤 사람은 친절함으로 갈등을 피한다. 어떤 사람은 친절함으로 자기 가치를 증명한다. 물론 이것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친절도 하나의 관계 방식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관계 방식이 서로 다르면, 아무리 좋은 사람끼리라도 힘들 수 있다. 나는 그 관계에서 친절을 받는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친절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감당을 혼자 하고 있었다. 상대는 나에게 친절을 주면서도 내가 그것을 부담으로 느끼는지 몰랐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내 부담을 숨겼기 때문이다. 나는 미안함을 숨겼고, 불편함을 숨겼고, 지침을 숨겼다. 왜냐하면 그것을 말하는 순간, 내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숨기는 순간, 관계는 더 깊어지지 못한다. 관계는 부드럽지만 얕아진다. 겉으로는 다정하지만, 속은 닿지 않는다. 닿지 않는 관계는 결국 외로움을 만든다. 나는 그 외로움까지 경험했다.
친절한 관계에서 생기는 외로움은 더 잔인하다. 왜냐하면 겉으로는 충분히 따뜻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외롭다고 말하면,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같다. “이렇게 좋은 사람이 옆에 있는데 왜 외로워?” “이렇게 다정한 관계인데 왜 힘들어?” 이런 질문을 받게 된다. 그래서 나는 더 침묵했다. 그리고 침묵은 결국 나를 더 고립시켰다. 친절은 많았지만, 나는 점점 더 혼자였다. 이게 친절이 규칙이 되어버린 관계의 함정이다. 따뜻함이 많아질수록, 진짜 감정을 말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진짜 감정을 말하면 그 따뜻함을 깨뜨리는 사람이 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나는 이 과정을 통해, 친절은 관계의 완성형이 아니라 관계의 재료라는 걸 깨달았다. 친절만으로 관계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친절만으로 관계가 깊어지지는 않는다. 관계를 깊게 만드는 건 친절보다 솔직함이다. 관계를 유지시키는 건 친절보다 경계다. 관계를 건강하게 만드는 건 친절보다 균형이다. 그리고 균형은 서로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 허락할 때 생긴다. 나는 그 관계에서 친절은 충분히 받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를 허락받았다는 감각은 부족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상대는 허락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허락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계속 미안해졌다.
좋은 사람과 멀어지는 법을 배운 순간, 관계의 기준이 바뀌었다
어떤 관계는 끝까지 설명이 안 된다. 누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무거워지고, 함께 있으면 편해야 하는데 오히려 더 조심하게 되고, 다정함이 쌓일수록 고마움보다 부담이 더 커지고, 결국엔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왜 나는 이 관계가 힘들지?” 그 질문이 무섭다. 그 질문을 인정하는 순간, 나는 내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너무 많은 이야기 속에서 살았다.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 “친절한 사람을 만나야 한다.” “배려 깊은 사람은 놓치면 안 된다.” “사람은 결국 마음이 중요하다.” 이런 말들은 대부분 맞다. 그런데 이런 말들은 한 가지를 빼먹는다. 좋은 사람과 좋은 관계는 다르다. 그리고 이 차이를 인정하는 순간부터, 관계를 바라보는 눈이 바뀐다. 나는 그걸 아주 늦게 배웠다. 늦게 배웠기 때문에 더 아팠다. 그리고 늦게 배웠기 때문에 더 확실해졌다.
좋은 사람과 멀어지는 일은, 나쁜 사람과 멀어지는 일보다 훨씬 어렵다. 나쁜 사람과의 관계는 이유가 명확하다. 상처를 받았고, 무시를 당했고, 소모되었고, 존중받지 못했다. 그래서 떠나면 된다. 떠나는 것이 오히려 회복이다. 하지만 좋은 사람과의 관계는 다르다. 좋은 사람은 나를 존중했고, 나를 아껴줬고, 나를 배려했다. 그래서 떠나면 죄책감이 남는다. 떠나는 순간에도 상처가 남는다. 떠난 뒤에도 후회가 남는다. 그리고 그 후회는 “내가 잘못했다”로 바뀌기 쉽다. 나는 그 후회를 오래 끌어안고 있었다. ‘좋은 사람을 떠나는 내가 이상한 걸까’라는 질문을 반복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질문이 바뀌었다. “왜 나는 좋은 사람과 함께 있어도 내 마음이 계속 줄어들었을까?” 이 질문은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완전히 바꿨다. 그 순간부터 나는 관계를 “상대가 얼마나 좋은가”로 판단하지 않고, “내가 그 관계 안에서 얼마나 자연스럽게 숨을 쉬는가”로 판단하기 시작했다.
이 관계가 힘들었던 핵심은 단순하다. 나는 그 관계에서 ‘받는 사람’이었고, 그 역할이 너무 오래 지속되었다. 받는 사람이라는 역할은 처음엔 행복하다. 누군가가 나를 챙겨주고, 내 감정을 살피고, 나를 존중해주는 건 누구에게나 기분 좋은 경험이다. 그런데 그 역할이 오래 지속되면, 받는 사람은 점점 불편해진다. 왜냐하면 받는 사람은 결국 ‘갚아야 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상대가 갚으라고 요구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상대는 그냥 친절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내 안에서 갚아야 한다는 규칙을 만들었다. “나는 이 사람에게 이만큼의 친절을 받았으니, 그만큼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는 이 사람에게 이만큼 배려를 받았으니, 내 감정을 더 잘 관리해야 한다.” “나는 이 사람에게 이만큼의 다정을 받았으니, 실망시키면 안 된다.” 이런 생각들은 결국 나를 점점 더 긴장시키고, 관계를 점점 더 무겁게 만든다. 친절이 사랑이 아니라, 부담이 된다. 그리고 부담이 된 친절은 결국 관계의 온도를 낮춘다. 웃음이 줄고, 말이 줄고, 편안함이 줄고, 대신 조심성이 늘어난다. 나는 그 관계에서 조심성이 너무 많아졌다. 조심성이 많아졌다는 건, 내가 그 관계에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허락받지 못했다고 느꼈다는 뜻이다. 상대가 허락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 관계는 이미 내 안에서 위험한 관계가 된 것이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좋은 사람과의 관계가 힘들어지는 순간은, 상대가 나를 힘들게 해서가 아니라, 내가 나를 숨기게 될 때다. 나는 그 사람 앞에서 내 감정을 숨겼다. 내 불편함을 숨겼다. 내 피로를 숨겼다. 내 예민함을 숨겼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너무 친절했기 때문이다. 그 친절 앞에서 내 감정은 늘 “이러면 안 되는데”가 되었다. 나는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건 당연하다. 그런데 나는 더 깊은 이유로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 사람에게 실망을 주고 싶지 않았다. 내가 실망을 준다는 것은,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게 관계를 무너뜨리는 진짜 지점이다. 상대를 사랑해서 조심하는 것과, 나를 증명하기 위해 조심하는 것은 다르다. 나는 후자였다. 나는 그 관계에서 사랑보다 증명을 더 하고 있었다. 그리고 증명은 사랑이 아니다. 증명은 관계를 점점 더 거래처럼 만들고, 결국 나를 지치게 만든다.
좋은 사람과 멀어져야 하는 순간은, 내가 그 사람 앞에서 점점 작아지는 순간이다. 나는 그 사람 앞에서 점점 작아졌다. 말도 줄었다. 내 감정도 줄었다. 내가 가진 색깔도 줄었다. 나는 더 조용해졌고, 더 조심스러워졌고, 더 예의바른 사람이 되었다. 겉으로 보면 성숙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건 성숙이 아니라 위축이라는 걸. 나는 그 관계에서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사실은 더 안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안전하다는 건,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사람. 안전하다는 건, 상대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사람. 안전하다는 건, 상대의 친절을 깨뜨리지 않는 사람. 그런데 관계는 안전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관계는 서로의 진짜 모습을 공유해야 깊어진다. 진짜 모습을 공유하지 못하는 관계는 결국 외로워진다. 나는 그 관계에서 외로웠다. 친절을 받으면서도 외로웠다. 그게 너무 이상했고, 그래서 더 죄책감이 들었다. “이렇게 좋은 사람과 있는데 내가 왜 외롭지?” 그 외로움은 단순히 상대가 부족해서 생긴 게 아니다. 내 진짜 감정이 관계 안에서 자리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친절은 많았지만, 내 감정은 들어갈 공간이 없었다. 관계가 너무 정돈되어 있었고, 그 정돈됨이 내 감정을 숨기게 만들었다.
그렇게 관계가 무거워질수록, 나는 더 자주 관계를 피하고 싶어졌다. 연락이 부담스러워졌고, 만남이 부담스러워졌고, “잘 지내?”라는 말조차 부담스러워졌다. 왜냐하면 “잘 지내?”라는 질문에 솔직하게 답하면, 그 사람의 친절을 또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친절을 받는 순간 나는 또 미안해질 것이고, 또 갚아야 할 것 같고, 또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고, 또 내 감정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점점 더 피했다. 그리고 피할수록 나는 더 미안해졌다. 이게 친절이 부담으로 변하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다. 친절을 받으면 미안해지고, 미안해지면 피하고 싶어지고, 피하면 죄책감이 커지고, 죄책감이 커지면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노력하면 더 지치고, 지치면 더 피하고 싶어진다. 관계가 이렇게 돌기 시작하면, 결국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 죄책감으로 유지된다. 나는 그걸 인정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죄책감으로 유지되는 관계는 결국 서로를 망가뜨린다. 상대는 상대대로 “왜 갑자기 멀어지지?”라는 혼란을 느끼고, 나는 나대로 “나는 왜 이렇게 나쁜 사람이 되었지?”라는 자기비난을 한다. 누가 잘못한 게 아니라, 구조가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결국 그 관계를 정리해야 했다. 하지만 정리하는 과정이 더 힘들었다. 나쁜 관계를 정리하는 건 결심만 하면 된다. 하지만 좋은 사람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건, 결심만으로 되지 않는다. 마음속에서 계속 설득해야 한다. “이건 내가 이기적인 게 아니야.” “이건 내가 감사하지 않은 게 아니야.” “이건 내가 좋은 사람을 버리는 게 아니야.” “이건 내가 나를 지키는 거야.” 이 설득을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는 또 한 가지를 배웠다. 관계를 끝내는 데 필요한 건 ‘정당한 이유’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마음’이라는 것. 우리는 관계를 끝낼 때 이유를 찾으려고 한다. 상대가 잘못한 이유, 내가 상처받은 이유, 이 관계가 틀렸다는 이유. 하지만 좋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그런 이유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끝내지 못한다. 하지만 관계는 이유가 없다고 해서 유지해야 하는 게 아니다. 관계는 지속 가능해야 한다. 내가 계속 나를 깎아내며 유지해야 하는 관계는 지속 가능한 관계가 아니다. 내가 계속 미안해하며 유지해야 하는 관계는 지속 가능한 관계가 아니다. 내가 계속 내 감정을 숨기며 유지해야 하는 관계는 지속 가능한 관계가 아니다. 그리고 이걸 인정하는 순간, 나는 관계를 끝내는 데 필요한 새로운 기준을 갖게 되었다. “이 관계가 나를 살리는가, 아니면 줄이는가.” 이 기준은 단순하지만 강력하다. 나는 그 관계에서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동안 죄책감을 버리지 못했다. 죄책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특히 상대가 좋은 사람이면, 죄책감은 더 오래 남는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내가 느끼는 죄책감은 사실 상대를 위한 감정이 아니라, 내 안의 오래된 두려움이었다. 나는 관계에서 늘 좋은 사람이 되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어왔고, 그래서 좋은 사람을 떠나는 것은 곧 사랑받을 자격을 잃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건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내 안의 신념의 문제였다. 나는 사랑을 조건으로 배웠고, 사랑을 성과로 배웠고, 사랑을 증명해야 하는 것으로 배웠다. 그래서 친절을 받으면 기쁘기보다 불안했고, 친절을 받으면 편안하기보다 빚진 기분이 들었다. 결국 내가 떠나는 것은 상대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오래된 신념을 떠나는 일이었다.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면 사랑받지 못한다”는 신념. “나는 누군가에게 잘해주면 그만큼 갚아야 한다”는 신념. “나는 누군가의 친절을 받으면 그만큼 더 완벽해져야 한다”는 신념. 이 신념들이 내 삶을 오래 지배했다. 그 관계는 그 신념을 더 선명하게 드러냈다. 그래서 나는 그 관계를 통해 상처받았지만, 동시에 중요한 것을 배웠다. 관계는 결국 상대를 보는 게 아니라, 나를 보는 일이기도 하다는 걸.
좋은 사람과 멀어지는 순간, 나는 처음으로 ‘나에게 좋은 관계’가 무엇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좋은 사람은 많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 많다. 그런데 나에게 좋은 관계는 그렇게 많지 않다. 나에게 좋은 관계는, 내가 굳이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다. 내가 굳이 잘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관계다. 내가 굳이 감정을 관리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다. 내가 굳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관계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그 사람 앞에서 작아지지 않는 관계다. 나는 이제 관계를 선택할 때, 상대가 얼마나 다정한지를 보지 않는다. 상대가 얼마나 친절한지를 보지 않는다. 상대가 얼마나 배려 깊은지를 보지 않는다. 물론 그런 것들은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그 관계 안에서 얼마나 자연스럽게 나를 유지할 수 있는지다. 관계는 나를 더 나답게 만들어야 한다. 관계는 나를 더 편하게 만들어야 한다. 관계는 나를 더 크게 만들어야 한다. 최소한, 나를 줄이지는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이 경험은 내 삶 전체의 기준을 바꿨다. 예전의 나는 ‘좋은 사람’이라는 말에 쉽게 설득됐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을 소중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그 관계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내가 더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중요한 건, 내가 내 마음을 지키면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친절이 부담이 되는 관계는, 결국 내 마음이 그 관계를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내 마음의 용량을 아는 건 성숙이다. 내 마음의 한계를 인정하는 건 용기다. 우리는 종종 한계를 인정하는 걸 패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한계를 인정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더 건강한 선택을 할 수 있다. 나는 그 관계에서 한계를 인정했다. “나는 이 친절을 계속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나는 이 관계에서 내가 계속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압박을 견디지 못한다.” “나는 이 관계에서 나를 잃어버리고 있다.” 이런 인정은 정말 아프지만, 그 인정이 없으면 나는 계속 나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 사람을 떠올리면 고맙다. 진심으로 고맙다. 그 사람은 나에게 좋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나에게 중요한 경험을 남겼다. 나는 그 관계를 통해, 친절이 때때로 사랑이 아니라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걸 배웠고, 좋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내가 나를 지킬 필요가 있다는 걸 배웠고, 무엇보다 내가 사랑을 빚처럼 느끼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내 삶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이제 나는 관계에서 ‘미안함’이 커지는 순간, 그 미안함을 그냥 참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그 미안함을 분석한다. “내가 지금 왜 미안하지?” “내가 정말 잘못했나?” “아니면 내가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미안한가?” “아니면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미안한가?” 이 질문을 할 수 있게 된 순간, 나는 관계에서 더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자유로워진 순간부터, 관계는 더 이상 내 자존감을 시험하는 무대가 아니라, 내 삶을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 되었다.
좋은 사람이 꼭 좋은 관계를 만드는 건 아니다. 그리고 이 말을 할 수 있게 된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좋은 사람 앞에서 초라해지지 않는다. 나는 좋은 사람을 만나면 고마워한다. 하지만 그 관계가 나를 줄이면, 나는 그 관계를 지키기 위해 나를 희생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지 않는다. 대신 관계 안에서 ‘나답게’ 숨 쉬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내가 배운 가장 큰 기준이다. 관계는 나를 시험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살리는 곳이어야 한다. 친절이 나를 살리면 그것은 사랑이지만, 친절이 나를 줄이면 그것은 부담이다. 사랑은 나를 더 크게 만들고, 부담은 나를 더 작게 만든다. 나는 그 차이를 알게 됐다. 그리고 그 차이를 알게 된 이후, 나는 관계를 더 잘 선택할 수 있게 됐다. 좋은 사람을 떠나는 일이 나쁜 일이 아니라, 나를 지키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