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전의 감각을 얻은 이야기
오늘은 늦어도 괜찮다는 확신이 나를 더 꾸준하게 만든 과정에 대해 이야기 하러고 해.
나는 한동안 ‘꾸준함’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 단어는 나에게 성실함이나 안정감 같은 좋은 이미지를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나를 조급하게 만드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꾸준하라는 말은 결국 “멈추지 마라”는 말로 들렸고, 멈추지 말라는 말은 “쉬지 마라”로 번역됐고, 쉬지 말라는 말은 결국 “너는 지금도 부족하다”로 들렸다. 그래서 나는 꾸준함을 원하면서도 꾸준함을 두려워했다. 꾸준함은 내게 ‘장기전의 태도’가 아니라 ‘끝없는 자기검열’의 다른 이름처럼 느껴졌다. 나는 꾸준히 하는 사람을 보면 부러워하면서도, 동시에 저 사람은 대체 어떻게 저렇게까지 자신을 몰아붙일 수 있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나는 꾸준히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느껴졌고, 꾸준함을 못 한다는 사실이 내 삶의 문제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말할 수 있다. 내가 꾸준하지 못했던 건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꾸준하지 못했던 건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었다. 내가 꾸준하지 못했던 건, 내 삶이 장기전이 아니라 단거리 전력질주로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설계는 내가 만든 게 아니라, 내가 받아들인 것이었다. 남들이 보여주는 성공담, 속도, 성과, 타임라인, 비교의 문화 속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내 삶을 단거리 레이스로 착각했다. 단거리 레이스라고 믿으면, 당연히 꾸준함은 불가능해진다. 단거리에서는 꾸준함이 아니라 폭발력이 필요하니까. 단거리에서는 리듬이 아니라 결과가 중요하니까. 단거리에서는 몸과 마음이 버티는 구조가 아니라, 지금 당장 밀어붙이는 힘이 중요하니까. 나는 오랫동안 내 삶을 단거리로 착각한 채 살았고, 그래서 꾸준함이 아니라 무너짐을 반복했다. 전력질주를 하고 나면 반드시 무너졌다. 그런데 나는 그 무너짐을 ‘필연적인 대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그 무너짐을 ‘내가 부족해서 생긴 문제’로 해석했다. 그래서 나는 더 빨리 가려고 했다. 더 빨리 가면, 다시는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더 빨리 가면, 불안이 사라질 거라고 믿었다. 더 빨리 가면, 내 삶이 안정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더 빨리 가면 무너짐은 더 빨라질 뿐이었다. 더 빨리 가면 회복의 시간이 줄어들 뿐이었다. 더 빨리 가면 나를 지킬 여유가 사라질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늘 같은 패턴으로 살았다. 불안해지면 달리고, 달리다 지치면 멈추고, 멈추면 죄책감을 느끼고, 죄책감이 커지면 다시 달리는 삶. 이 삶에서 꾸준함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꾸준함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꾸준함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구조 속에 갇힌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주 조용히 내 안에서 기준이 바뀌기 시작했다. 늦어도 괜찮다는 확신이 생기면서부터였다. 그 확신은 나를 느슨하게 만든 게 아니라, 오히려 나를 더 꾸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단순히 마음가짐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구조가 바뀌는 경험이었다. 늦어도 괜찮다는 확신이란, 단순히 ‘괜찮아’라고 나를 위로하는 말이 아니라, 내 삶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새로운 설계도였다. 그리고 그 설계도는 내가 앞으로 살아갈 방식 전체를 바꾸었다.

나는 ‘늦음’을 두려워해서 꾸준하지 못했다: 전력질주와 붕괴의 반복
내가 꾸준하지 못했던 시절을 떠올리면, 그때의 나는 사실 꽤 열심히 살았다. 문제는 열심히 살지 않았던 게 아니라, 열심히 사는 방식이 항상 극단적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어느 날 갑자기 결심하고, 어느 날 갑자기 몰입하고, 어느 날 갑자기 불타오르고, 그 에너지로 단기간에 많은 것을 해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는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너는 하면 하는 사람이구나.” “너는 집중력이 대단하다.” “너는 진짜 추진력이 좋다.” 이런 말들은 나를 더 빠르게 만들었다. 나는 나를 더 몰아붙였다. 더 큰 목표를 세웠고, 더 짧은 시간 안에 결과를 내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 속도는 곧 내 자존감이 되었다. 빨리 하면 나는 괜찮은 사람이었고, 빨리 하지 못하면 나는 무능한 사람이었다. 이 구조가 만들어진 순간부터 꾸준함은 이미 끝났다. 왜냐하면 꾸준함은 속도가 아니라 리듬으로 유지되는 것인데, 나는 리듬이 아니라 속도로 나를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속도로 나를 평가하는 사람은 꾸준함을 할 수 없다. 속도로 나를 평가하는 사람은 잠깐 느려지기만 해도 자신을 부정하게 된다. “나는 왜 이렇게 느려졌지?” “나는 왜 이렇게 떨어졌지?” “나는 이제 끝났나?” 이런 질문이 자동으로 튀어나온다. 그리고 그 질문이 튀어나오는 순간, 사람은 다시 속도를 올려서 자신을 증명하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꾸준함 대신, 전력질주를 반복했다. 전력질주를 하고 나면 당연히 무너진다. 몸이 지치고, 마음이 지치고, 감정이 바닥나고, 집중력이 끊어진다. 그런데 그 무너짐의 시간을 나는 ‘회복’으로 인정하지 못했다. 나는 그 시간을 ‘게으름’으로 해석했다. 그러니 회복은 회복이 되지 못하고, 죄책감이 된다. 죄책감이 되면 다시 불안해지고, 불안해지면 다시 달리고, 다시 달리면 다시 무너진다. 이게 내 삶의 패턴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는 늘 무언가를 하는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실제로도 나는 멈춰있지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나는 ‘앞으로 가는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 앞으로 가는 게 아니라, 불안에서 도망치기 위해 움직였다. 불안이 나를 몰아붙였고, 나는 불안이 원하는 속도로 달렸다. 그러다 지치면 멈췄고, 멈추면 불안이 더 커졌다. 그래서 다시 달렸다. 이것은 성장의 사이클이 아니라, 소진의 사이클이었다.
이 패턴의 핵심은 ‘늦음에 대한 공포’였다. 나는 뒤처지는 걸 너무 두려워했다. 남들보다 늦으면 끝이라고 믿었다. 남들보다 늦으면 기회가 없다고 믿었다. 남들보다 늦으면 내가 가치가 없어진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이라도 늦어지는 느낌이 들면 바로 속도를 올렸다. 그 속도는 단지 일을 빨리 하는 속도가 아니라, 나를 몰아붙이는 속도였다. 나는 내가 늦어지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는 순간,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너는 왜 이 정도밖에 못 해?” “너는 왜 아직도 여기야?” “너는 왜 이렇게 느려?” 이 공격은 나를 잠깐 움직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공격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오래 갈 수 없다. 공격은 에너지가 아니라 상처다. 상처는 오래 갈수록 곪는다. 나는 오래 곪아가면서도, 계속 움직이려고 했다. 그래서 꾸준함은 불가능했다. 꾸준함은 상처를 기반으로 세워지지 않는다. 꾸준함은 안정감을 기반으로 세워진다. 그런데 내 삶에는 안정감이 없었다. 오직 불안만 있었다. 그리고 불안은 꾸준함을 만들지 못한다. 불안은 폭발력은 만들 수 있어도, 지속력은 만들지 못한다. 불안이 만든 폭발력은 짧고 강하다. 그리고 그 폭발력은 사람을 태운다. 나는 태워가면서 움직였다. 그때 나는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묻지 않았다. 묻지 않은 이유는 단순하다. 묻는 순간 내가 지금까지 달려온 모든 이유가 무너질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계속 달렸다. 그리고 그 달림이 멈추는 순간, 나는 공허해졌다.
나는 그때 ‘꾸준함’이라는 단어를 너무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꾸준함은 늘 완벽한 상태에서, 흔들림 없이, 일정한 속도로 가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진짜 꾸준함은 그런 게 아니다. 진짜 꾸준함은 흔들리는 날에도 끊어지지 않는 힘이다. 진짜 꾸준함은 의욕이 없는 날에도 아주 작은 움직임을 유지하는 힘이다. 진짜 꾸준함은 내 마음이 무너지는 날에도 다시 돌아오는 힘이다. 그런데 나는 꾸준함을 너무 높은 기준으로 세워놓았고, 그 기준에 맞추기 위해 더 무리했고, 더 무리했기 때문에 더 쉽게 끊어졌다. 나는 끊어질 때마다 스스로를 비난했고, 비난할수록 다시 시작하는 힘은 줄어들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 같은 자리에서 반복했다. 열심히 했다가 무너지고, 다시 결심했다가 무너지고, 다시 계획을 세웠다가 무너지고. 이 반복은 겉으로 보기에는 노력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방향 없는 소모였다. 나는 그 소모 속에서 점점 지쳤고, 지칠수록 나는 더 조급해졌다. 조급해질수록 나는 더 빨라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더 빨라질수록 나는 더 쉽게 무너졌다. 나는 그 구조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내가 진짜로 무너진 경험이 있었다. 단순히 지치는 수준이 아니라, 마음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경험. 몸은 움직이는데 마음이 따라오지 않는 경험. 목표를 세우면 오히려 숨이 막히는 경험. 계획을 세우면 오히려 불안이 커지는 경험. “다시 시작하자”라는 말이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게 아니라, 나를 더 눌러버리는 경험. 그 경험은 나에게 한 가지 사실을 강제로 알려줬다. 나는 지금까지 ‘빨리 가는 방식’으로는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것. 내가 다시 살아나려면, 내 삶의 설계를 바꿔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나는 이런 질문을 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뭘까?” “나는 왜 이렇게까지 빨라야만 하는 걸까?” “늦으면 정말 끝일까?” 이 질문이 시작되면서, 아주 천천히 내 안에서 확신이 자라기 시작했다. 늦어도 괜찮다는 확신. 그 확신은 단지 위로가 아니었다. 그 확신은 내 삶을 다시 작동시키는 구조였다. 그리고 이 구조가 생기면서, 나는 비로소 꾸준함을 ‘의지’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만들 수 있었다.
늦어도 괜찮다는 확신이 생기자, ‘꾸준함’이 의지가 아니라 시스템이 되었다
늦어도 괜찮다는 확신은, 나를 느슨하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확신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 확신이 생기면서, 내 삶에서 가장 큰 에너지 낭비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낭비는 무엇이었냐면, 바로 ‘비교’였다. 비교는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먹는다. 비교는 단지 남의 성과를 보는 게 아니라, 내 삶의 방향을 남의 시간표에 맞춰 끊임없이 수정하는 행위다. 비교를 하면 나는 내 속도를 조절할 수 없게 된다. 남이 빠르면 나는 불안해지고, 남이 성과를 내면 나는 조급해지고, 남이 앞서가면 나는 나를 비난하게 된다. 그리고 그 감정들이 쌓이면, 나는 결국 ‘나를 몰아붙이는 방식’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런데 늦어도 괜찮다는 확신이 생기자, 비교가 힘을 잃었다. 비교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비교가 내 삶의 핸들을 잡지 못하게 되었다. 비교는 여전히 옆에서 속삭였지만, 나는 그 속삭임을 기준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부터 내 삶은 ‘남을 이기는 삶’이 아니라 ‘내가 오래 가는 삶’으로 바뀌었다.
이 변화가 왜 꾸준함을 만들었는지 설명하려면, 꾸준함의 본질을 다시 봐야 한다. 꾸준함은 사실 “계속 하는 능력”이 아니다. 꾸준함은 “끊어져도 다시 돌아오는 능력”에 가깝다. 그런데 다시 돌아오려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안전지대가 있어야 한다. 다시 돌아오려면, 끊어진 나를 비난하지 않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 다시 돌아오려면, 멈춤을 실패로 해석하지 않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나는 늦어도 괜찮다는 확신을 얻으면서, 그 안전지대를 내 안에 만들었다. 예전에는 하루라도 쉬면, 하루라도 느려지면, 하루라도 성과가 없으면, 나는 바로 나를 공격했다. 그런데 늦어도 괜찮다는 확신이 생기자, 쉬는 날이 ‘나태’가 아니라 ‘유지’로 바뀌었다. 느려지는 날이 ‘퇴보’가 아니라 ‘회복’으로 바뀌었다. 성과가 없는 날이 ‘무가치’가 아니라 ‘준비’로 바뀌었다. 이 해석의 변화가 꾸준함을 가능하게 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늦어도 괜찮다는 확신이 단순히 “마음 편하게 먹자” 수준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확신은 나에게 새로운 기준을 주었다. 예전의 기준은 늘 “남들보다 빠르게”였다. 그래서 나는 항상 기준을 외부에 두고 살았다. 남들이 얼마나 했는지, 남들이 얼마나 성과를 냈는지, 남들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나는 그 기준에 맞춰 나를 재단했다. 그런데 늦어도 괜찮다는 확신이 생기자, 기준이 내부로 들어왔다. “나는 내 속도로 가도 된다.” “나는 내 리듬으로 살아도 된다.” “나는 내가 무너지지 않는 방식으로 가도 된다.” 이 기준이 생기면서, 나는 처음으로 내 삶의 주인이 된 느낌을 받았다. 이전에는 내가 나를 끌고 가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사회가 만든 속도감이 나를 끌고 갔던 것이다. 그 속도감에서 벗어나자, 나는 비로소 내 삶을 내 손으로 잡을 수 있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꾸준함이 의지로 되는 게 아니라, 구조로 된다는 걸 알았다. 사람들은 꾸준함을 의지의 문제로 본다. “나는 의지가 약해서 꾸준히 못 해.” “나는 성격이 게을러서 꾸준히 못 해.” 하지만 의지는 한계가 있다. 의지는 피곤해지고, 의지는 흔들리고, 의지는 감정에 따라 약해진다. 꾸준함을 의지에 맡기면, 꾸준함은 언제든 끊어진다. 그래서 꾸준한 사람들은 의지로만 사는 게 아니다. 그들은 시스템을 만든다. 루틴을 만들고, 환경을 만들고, 자신이 오래 갈 수 있는 리듬을 만든다. 그런데 나는 그 시스템을 만들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늘 단거리 기준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단거리 기준에서는 시스템이 아니라 폭발력이 중요하다. 그런데 늦어도 괜찮다는 확신이 생기자, 나는 처음으로 장기전의 기준을 받아들였다. 장기전에서는 폭발력보다 지속력이 중요하다. 장기전에서는 열정의 크기보다 회복의 능력이 중요하다. 장기전에서는 하루의 성과보다 일주일의 리듬이 중요하다. 장기전에서는 목표의 크기보다 방향의 안정성이 중요하다. 나는 이 기준을 받아들이면서, 내 삶을 새로 설계하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먼저 바꾼 것은 ‘하루를 평가하는 방식’이었다. 예전에는 하루를 결과로 평가했다. 오늘 얼마나 했는지, 오늘 얼마나 성과가 있었는지, 오늘 얼마나 남들보다 앞서갔는지. 그래서 결과가 없는 날은 죄책감이었고, 죄책감은 내일을 망쳤다. 하지만 장기전의 기준에서는 하루를 결과로 평가하지 않는다. 하루는 리듬으로 평가한다. 오늘 내가 무너지지 않았는지, 오늘 내가 나를 버리지 않았는지, 오늘 내가 내 삶을 유지했는지. 이 기준은 눈에 보이는 성과를 줄일 수 있지만, 삶을 무너지지 않게 만든다. 그리고 삶이 무너지지 않으면, 성과는 결국 따라온다. 나는 그걸 경험했다. 결과를 쫓을 때는 오히려 결과가 멀어졌는데, 리듬을 지키기 시작하자 결과는 자연스럽게 쌓였다. 이건 생각보다 큰 차이다. 성과를 목표로 삼으면 성과가 없을 때마다 흔들린다. 하지만 리듬을 목표로 삼으면 성과가 없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으면 결국 계속 가게 되고, 계속 가면 성과는 자연스럽게 생긴다.
그 다음으로 바꾼 것은 ‘시작의 기준’이었다. 예전에는 시작이 거창해야 했다. 시작하려면 마음이 뜨거워야 했다. 시작하려면 확신이 있어야 했다. 시작하려면 완벽한 계획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자주 시작을 미뤘다. “아직 준비가 안 됐어.” “지금은 타이밍이 아니야.” “좀 더 완벽하게 해야 해.” 그런데 장기전에서는 시작이 거창할 필요가 없다. 장기전에서는 시작이 작아야 한다. 작아야 오래 간다. 작아야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작아야 부담이 없다. 나는 늦어도 괜찮다는 확신을 얻고 나서, 시작을 작게 만들었다. 하루에 10분만, 하루에 한 줄만, 하루에 한 번만. 이 작은 시작은 나를 꾸준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작은 시작은 실패의 공포를 줄여주기 때문이다. 실패의 공포가 줄어들면, 다시 시작하는 힘이 커진다. 나는 그 구조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건 정말 결정적이었다. 예전에는 나는 “크게 시작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시작을 못 했다. 그런데 이제는 “작게 시작해도 된다”는 허락이 생기면서, 시작이 쉬워졌다. 시작이 쉬워지면, 꾸준함은 절반 이상 해결된다. 꾸준함은 사실 유지보다 시작에서 많이 무너진다. 시작이 부담스러우면 사람은 계속 미룬다. 미루면 죄책감이 쌓인다. 죄책감이 쌓이면 시작이 더 어려워진다. 나는 그 악순환을 끊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꾼 것은 ‘속도에 대한 태도’였다. 예전에는 속도가 느려지면 곧바로 불안해졌다. 그런데 늦어도 괜찮다는 확신이 생기자, 속도가 느려지는 순간에도 나는 나를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이건 엄청난 변화다. 느려지는 순간에도 나를 믿을 수 있다는 건, 삶의 기반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예전에는 속도가 곧 나의 가치였다. 그래서 느려지면 가치가 떨어진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제는 속도가 나의 가치가 아니었다. 속도는 내 상태의 일부일 뿐이었다. 어떤 날은 빠르고, 어떤 날은 느리다. 그건 실패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나는 그 흐름을 인정하면서, 더 이상 속도를 억지로 끌어올리지 않았다. 속도를 억지로 끌어올리지 않으니, 나는 덜 무너졌다. 덜 무너지니, 나는 더 오래 갔다. 더 오래 가니, 나는 더 꾸준해졌다. 이건 단순한 심리의 변화가 아니라, 실제로 삶이 바뀌는 방식이었다.
장기전의 감각을 얻었다는 건, 더 강해진 게 아니라 ‘덜 무너지게 된 것’이었다
사람들은 장기전을 말할 때, 흔히 “끝까지 버티는 힘”을 떠올린다. 장기전의 사람은 강해야 하고, 흔들리지 않아야 하고, 포기하지 않아야 하고, 계속 밀어붙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경험한 장기전은 그 반대였다. 장기전의 감각을 얻는다는 건, 더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부드러워지는 것이었다. 더 단단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유연해지는 것이었다. 더 버티는 것이 아니라, 더 회복하는 것이었다. 장기전은 강철 같은 사람만이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덜 부러뜨리는 법을 배운 사람이 하는 것이다. 나는 그걸 늦어도 괜찮다는 확신을 통해 배웠다.
내가 장기전의 감각을 얻었다는 걸 처음 자각한 순간은, 어느 날 문득 내가 예전처럼 조급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였다. 예전의 나는 늘 마음이 앞서갔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맞는지, 지금 내가 가는 방향이 맞는지, 지금 내가 남들보다 늦지 않은지. 이런 질문들이 하루 종일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현재를 살지 못했다. 항상 미래를 살았다. 미래에서 현재를 평가했고, 미래에서 현재를 채찍질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질문들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 질문들이 줄어든 자리에 다른 질문이 들어왔다. “오늘 나는 나를 얼마나 지켰나?” “오늘 나는 무너지지 않았나?” “오늘 나는 내 리듬을 유지했나?” 이 질문들은 나를 조급하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안정시키고, 내 삶을 길게 만들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나는 이제 단거리 레이스가 아니라 장기전을 살고 있구나.
장기전의 감각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장기전의 감각은 실패를 통해 생긴다. 특히 ‘빨리 가려다 무너진 실패’를 통해 생긴다. 나는 그 실패를 경험했다. 빨리 가면 멋져 보이고, 빨리 가면 인정받고, 빨리 가면 성과가 나오지만, 빨리 가면 결국 무너진다는 걸 몸으로 배웠다. 그리고 그 실패는 내게 하나의 질문을 남겼다. “나는 정말 무엇을 원하나?” 단거리에서의 성과를 원하나, 아니면 장기적으로 내 삶이 유지되는 상태를 원하나. 나는 그 질문 앞에서 결국 후자를 선택했다. 그 선택이 바로 늦어도 괜찮다는 확신의 시작이었다.
늦어도 괜찮다는 확신이 생기면, 삶은 조금 이상하게 바뀐다. 이전에는 느려지면 불안했는데, 이제는 느려져도 불안이 덜하다. 이전에는 남이 앞서가면 조급했는데, 이제는 남이 앞서가도 마음이 덜 흔들린다. 이전에는 결과가 없으면 나를 부정했는데, 이제는 결과가 없어도 나를 유지할 수 있다. 이 변화는 작아 보이지만, 사실은 엄청난 변화다. 왜냐하면 이 변화는 ‘나를 유지하는 능력’이 생겼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장기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재능도 아니고 의지도 아니다. 유지다.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결국 이긴다. 그리고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을 혹사시키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이제 “나를 혹사시키는 방식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렸다. 그리고 그 믿음을 버린 순간부터, 나는 오히려 더 오래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제 꾸준함을 다르게 이해한다. 꾸준함은 매일 똑같이 하는 것이 아니다. 꾸준함은 매일의 컨디션을 인정하면서도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꾸준함은 어떤 날에는 100을 하고, 어떤 날에는 10을 하더라도, ‘0’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꾸준함은 내 삶이 흔들려도, 다시 돌아오는 길을 내가 알고 있는 것이다. 나는 늦어도 괜찮다는 확신을 통해, 그 길을 알게 되었다. 예전에는 멈추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멈추는 순간 나는 절망했다. 하지만 이제는 멈춤이 끝이 아니라는 걸 안다. 멈춤은 장기전의 일부다. 멈춤은 회복이고, 회복은 지속을 위한 투자다. 이걸 아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멈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멈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자, 나는 더 오래 갈 수 있게 되었다.
장기전의 감각을 얻었다는 건, 사실 내 삶의 목표가 바뀌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목표가 ‘빨리 성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성공의 정의도 빠른 결과에 맞춰져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목표가 ‘오래 살아남는 것’이 되었다. 내가 하는 일을 오래 유지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오래 좋아하고, 내가 소중한 관계를 오래 지키고, 내가 내 마음을 오래 지키는 것. 이게 내 목표가 되었다. 그리고 이 목표는 이전의 목표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면서도, 훨씬 더 깊다. 빠른 성공은 멋져 보이지만, 빠른 성공은 종종 사람을 망가뜨린다. 빠른 성공은 종종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빠른 성공은 종종 사람을 외롭게 만든다. 빠른 성공은 종종 사람을 스스로에게서 멀어지게 만든다. 나는 그 위험을 이제 안다. 그래서 나는 빠른 성공보다, 오래가는 삶을 선택했다. 이 선택이 나를 꾸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안다. 늦어도 괜찮다는 확신은 “포기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끝까지 가기 위해 속도를 조절해도 된다”는 말이라는 것을. 늦어도 괜찮다는 확신은 나를 멈추게 하는 말이 아니라, 나를 계속 움직이게 하는 말이다. 이 확신은 내 삶을 더 크게 만들었다. 나는 더 이상 단기간에 내 인생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내 인생을 천천히 바꾸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천천히 바꾸는 사람은, 결국 바꾼다. 빨리 바꾸려다 무너지는 사람보다, 천천히 바꾸는 사람이 더 멀리 간다.
마지막으로, 내가 장기전의 감각을 얻었다고 느끼는 가장 큰 증거는 이것이다. 나는 이제 내 삶에서 ‘늦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늦음은 더 이상 내 결함이 아니다. 늦음은 내 리듬이다. 늦음은 내가 나를 지키면서 갈 수 있는 속도다. 늦음은 내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선택한 속도다. 그리고 이 늦음은 나를 더 꾸준하게 만든다. 꾸준함은 결국 나를 지키는 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나를 지키지 못하면, 꾸준함은 불가능하다. 나는 늦어도 괜찮다는 확신을 얻으면서, 처음으로 나를 지키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그 배움이 내 삶을 바꿨다. 이제 나는 예전보다 빠르지 않다. 하지만 예전보다 멀리 간다. 예전보다 더 오래 간다. 예전보다 더 깊게 간다. 그리고 그게 내가 원하던 삶이었다.
늦어도 괜찮다는 확신은 나를 느슨하게 만들지 않았다. 그 확신은 나를 꾸준하게 만들었다. 그 확신은 나를 장기전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장기전의 사람은 결국,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자신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이제 그 사람이 되고 싶다. 아니, 이미 조금은 그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늦어도 괜찮다는 확신을 얻은 이후, ‘꾸준함’이라는 단어를 다시 사랑하게 되었다. 그 꾸준함은 나를 몰아붙이는 단어가 아니라, 나를 지키는 단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도 사실은 하나다. 혹시 지금 누군가가, 나처럼 ‘늦음’을 두려워해서 자신을 불태우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 말해주고 싶어서다. 늦어도 괜찮다고. 늦는 사람은 실패한 사람이 아니라, 오래 가는 사람이라고. 그리고 오래 가는 사람이 결국, 가장 멀리 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