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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빨라질 수 있어도 굳이 그러지 않기로 한 이유

by think28148 2026. 2. 9.

속도를 선택하지 않는 선택
오늘은 다시 빨라질 수 있어도 굳이 그러지 않기로 한 이유에 대해 이야기 하러 해

 

 

다시 빨라질 수 있어도 굳이 그러지 않기로 한 이유
다시 빨라질 수 있어도 굳이 그러지 않기로 한 이유

 

 

 

 

사람들은 ‘느린 삶’을 종종 패배의 언어로 해석한다. 뒤처졌으니까 느리게 가는 거라고, 능력이 부족하니까 속도를 못 내는 거라고, 상황이 안 되니까 어쩔 수 없이 천천히 가는 거라고. 그래서 느리게 사는 사람을 보면 은근히 동정하거나, 위로하거나, 혹은 “그래도 언젠가는 다시 빨라져야지”라고 말한다. 느림은 임시적인 것으로, 빠름은 궁극적인 목표로, 마치 인생의 정답처럼 취급된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빨리빨리’라는 말 속에서 자랐고, 그 말이 단지 생활 습관이 아니라 삶의 태도라는 것까지 너무 자연스럽게 배웠다. 빠르게 움직이면 부지런한 사람이고, 느리면 게으른 사람이라는 프레임이 기본값처럼 깔려 있다. 그래서 우리는 속도를 낮추는 선택을 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서 죄책감을 느낀다. 아무도 직접적으로 비난하지 않아도, “내가 지금 잘못 살고 있나?”라는 질문이 자동으로 떠오른다. 그리고 그 질문이 떠오르는 순간, 우리는 다시 속도를 올리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 반대다. 나는 다시 빨라질 수 있었다. 다시 이전처럼 일정표를 빽빽하게 채우고, 목표를 더 촘촘히 세우고, 성과를 더 자주 내고,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고, 더 높은 효율로 움직이고, 더 빠른 속도로 결과를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방법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이미 그 세계에서 오래 살아봤다.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언어를 알고,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하루를 설계하고,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어떤 방식으로 불안을 생산성으로 바꾸는지 잘 알고 있었다. 다시 그 속도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때는, 내가 다시 빨라지지 않으면 뒤처질 거라는 공포 때문에 늘 준비하고 있었다. 빨리 달릴 수 있는 사람은 속도를 내는 기술이 몸에 배어 있다. 일정표를 짜는 법, 우선순위를 정하는 법, 잠을 줄이는 법, 멀티태스킹하는 법, 더 강한 동기를 만드는 법, 자신을 계속 불안하게 만들어서 움직이게 하는 법. 나는 그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그 속도로 돌아가라고 하면, 나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실제로 다시 빨라지기 시작한 적도 있었다. 잠깐의 공백 이후 다시 속도를 올리면, 사람들은 박수를 친다. “역시 너는 다시 돌아오는구나.” “너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 “너는 결국 해내는 사람이야.” 그 박수는 달콤하다. 내가 다시 살아난 것처럼 느끼게 한다. 내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온 것처럼 느끼게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다시 빨라질 수 있는데도 굳이 그러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이 결심은 포기가 아니었다. 더 이상 노력하지 않겠다는 선언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결심은 내가 내 삶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존중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에 가까웠다. 나는 더 빠르게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 자체를 내가 선택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생각보다 훨씬 더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빠르게 사는 것은 사회가 박수쳐주는 방식이지만, 속도를 낮추는 것은 늘 설명을 요구받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빠른 사람에게는 이유를 묻지 않는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해?”라고 묻지 않는다. 오히려 “대단하다”라고 말한다. “본받아야겠다”라고 말한다. “그 정도는 해야지”라고 말한다. 하지만 느린 사람에게는 꼭 묻는다. “왜 그렇게까지 천천히 가?” “왜 굳이?” “그럼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거야?” “계획은 있어?” “괜찮아?” 느림은 항상 변명해야 하는 위치에 놓인다. 그래서 속도를 선택하지 않는 선택은 단순히 리듬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사회가 주는 박수의 방향을 거슬러 걷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그 길을 택했다. 그리고 그 이후 내 삶은, 이전보다 더 조용해졌지만, 더 깊어졌다. 더 빠르게 살던 시절보다 덜 불안해졌고, 더 안정적으로 성장했고, 무엇보다 ‘내가 내 삶을 살고 있다’는 감각이 돌아왔다.

그 감각은 성과로 환산되지 않는다. 숫자로 보이지 않는다. 남에게 설명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그 감각이 없으면 어떤 성과도 결국 공허해진다는 걸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속도를 선택하지 않기로 했다.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할 수 있는데도. 내가 못 달리는 사람이 되어서가 아니라, 달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선택할 수 있었다. 빨라질 수 있는 능력이 생겼는데도, 그 능력을 내 삶의 기본값으로 쓰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그건 어쩌면 내가 처음으로 진짜 자유를 경험한 순간이었다. 자유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무엇이든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상태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속도를 올릴수록 내 인생은 ‘내 기준’이 아니라 ‘남의 시간표’에 맞춰지기 시작했다

내가 속도를 내던 시절에는, 늘 내가 능동적으로 살고 있다고 믿었다. 남들이 하라고 해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해서 하는 거라고, 더 높은 곳을 보고 있기 때문에 더 열심히 사는 거라고, 내가 선택한 길을 내가 책임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는 주체적으로 산다”는 말을 좋아했다. 그 말은 나를 강한 사람처럼 느끼게 했다. 남에게 끌려가는 사람이 아니라, 내 삶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주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니 그건 절반만 맞았다. 속도를 올릴 때 나는 분명 선택하고 있었지만, 그 선택의 배경에는 ‘내가 정말 원하는 것’보다 ‘남들이 인정하는 방식’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내 인생을 선택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남들이 인정해주는 인생을 선택하고 있었다.

속도는 사람을 착각하게 만든다. 내가 빨리 움직이고 있으면, 내가 뭔가를 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바쁘면,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다. 일정이 꽉 차 있으면, 나는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다. 해야 할 일이 많으면, 나는 성장하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 감각은 굉장히 강력하다. 그래서 속도를 올리는 순간부터 우리는 ‘속도 자체’를 가치로 착각한다. 그리고 속도가 가치가 되면, 그 속도는 곧 도덕이 된다. 빨리 사는 것이 옳고, 느리게 사는 것이 틀린 것처럼 느껴진다. 이때부터 삶은 위험해진다. 왜냐하면 삶의 방식이 도덕이 되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를 쉽게 죄인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 생산성이 낮았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내 자신을 한심하게 느낀다. 오늘 하루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내 존재를 부정하게 된다. 이런 구조가 만들어지면, 삶은 결국 나를 살리는 게 아니라 나를 평가하는 시스템이 된다.

속도를 올릴수록 내가 얻는 건 성취가 아니라, 성취를 증명해야 하는 압박이었다. 처음에는 결과가 나를 살렸다. 내가 무언가를 해냈다는 사실이 나를 안정시켰고, 사람들의 칭찬이 나를 버티게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결과가 나를 살리는 게 아니라, 결과가 없으면 내가 불안해지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성취는 더 이상 기쁨이 아니라 생존이 되었다. 그때부터 속도는 내가 삶을 즐기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나를 불안에서 잠시 숨겨주는 은신처가 되었다.

나는 예전에 “바쁘면 불안이 줄어든다”는 말을 믿었다. 사실 그 말은 맞다. 바쁘면 불안이 줄어든다. 하지만 그건 불안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불안을 느낄 시간이 없어지는 것이다. 불안은 마음속에 그대로 남아 있고, 단지 바쁜 일정으로 덮여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일정이 잠깐이라도 비면, 불안은 더 크게 올라온다. 마치 오랫동안 눌려 있던 스프링이 튀어 오르듯이. 나는 그 불안을 다시 눌러버리기 위해 속도를 더 올렸다. 더 바빠졌다. 더 계획을 세웠다. 더 촘촘하게 살았다. 그런데 그럴수록 불안은 더 강해졌다. 왜냐하면 불안은 단순히 “너는 부족해”라고 말하는 감정이 아니라, “너는 지금 너를 잃고 있어”라고 말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걸 몰랐다.

속도는 생각보다 교묘하다. 속도를 올리면, 내 삶의 모든 기준이 자연스럽게 ‘비교 가능한 형태’로 변한다. 숫자, 일정, 성과, 진행률, 누적, 랭킹. 나는 어느새 내가 가진 시간을 ‘살아가는 시간’이 아니라 ‘증명해야 할 시간’으로 바꾸고 있었다. 하루를 보낼 때도 “오늘 나는 무엇을 느꼈는가”가 아니라 “오늘 나는 무엇을 했는가”가 기준이 된다. 그리고 “무엇을 했는가”는 결국 타인의 눈으로 검증되는 항목이 된다. 이런 삶을 오래 살다 보면,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조차도 성과의 언어로 변한다. 예를 들어 책을 읽는 것도 ‘얼마나 읽었는지’로 바뀌고, 운동을 하는 것도 ‘얼마나 했는지’로 바뀌고, 사람을 만나는 것도 ‘어떤 네트워크를 만들었는지’로 바뀐다. 삶의 모든 행위가 ‘수치화 가능한 것’으로 재편된다. 그 순간부터 삶은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운영된다.

운영되는 삶은 겉보기에는 멋져 보인다. 뭔가 굉장히 야무지고, 체계적이고, 자기관리 잘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는 내가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줄어든다. 내가 슬픈지, 지친지, 기쁜지, 안정적인지, 그런 감각이 점점 둔해진다. 왜냐하면 감각은 속도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감각은 느림을 요구한다. 감각은 멈춤을 요구한다. 감각은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다. 감각은 내가 내 마음과 만나야 생긴다. 그런데 속도를 올리면, 내 마음과 만날 시간이 없다. 나는 내 마음을 만나지 않고도 살 수 있다고 믿게 된다. 그 믿음은 어느 정도까지는 통한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한다. 마음은 언젠가 신호를 보낸다. 몸으로, 감정으로, 관계로. 그리고 그 신호가 오면, 그때는 속도를 낮추고 싶어도 이미 늦은 경우가 많다.

더 큰 문제는, 속도를 올리면 결국 ‘남의 시간표’가 내 삶의 지도처럼 붙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로는 “각자 인생이 다르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모두가 어떤 암묵적인 시간표를 공유하고 있다. 몇 살에는 이 정도여야 하고, 이 경력에는 이 정도여야 하고, 이 시기에는 이미 이런 걸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기준. 그 기준은 누가 정한 것도 아닌데 너무 선명해서, 그 시간표에서 벗어나면 마치 내 인생이 잘못된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그 시간표에 맞추기 위해 속도를 올렸다. 그리고 속도를 올릴수록 그 시간표는 더 강하게 내 목을 조였다. 왜냐하면 속도는 한 번 올리기 시작하면, ‘그 속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무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빨리 가는 사람은 멈추면 안 된다. 빨리 가는 사람은 쉬면 안 된다. 빨리 가는 사람은 흔들리면 안 된다. 빨리 가는 사람은 뒤처지면 안 된다. 그래서 빠른 삶은 늘 긴장 속에서 유지된다. 속도를 내는 순간부터 나는 더 많은 자유를 얻는 게 아니라, 더 많은 의무를 짊어졌다. 그리고 그 의무는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질문을 지워버렸다.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이 질문들은 느린 질문이다. 빨리 살면 그 질문을 할 시간이 없다. 빨리 살면 그 질문은 사치가 된다. 빨리 살면 그 질문은 나를 멈추게 하니까. 그래서 속도를 올릴수록 나는 나의 내면과 멀어졌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무엇을 싫어하는지, 내가 어디서 지치는지, 내가 어디서 살아나는지, 그런 것들이 희미해졌다. 대신 나는 더 능숙해졌다. 더 잘 해냈고, 더 잘 버텼고, 더 잘 맞췄다. 그런데 그 능숙함은 결국 ‘나답다’는 느낌을 빼앗아 갔다. 나는 능숙한 사람이 되었지만, 나를 잃어가고 있었다.

내가 속도를 낮추기로 결심했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건, 두려움이었다. 속도를 낮추면 나는 뒤처질 것 같았다. 속도를 낮추면 사람들이 나를 잊을 것 같았다. 속도를 낮추면 나는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을 것 같았다. 속도를 낮추면 나는 경쟁에서 밀릴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두려움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아주 정확한 진실이 있었다. 속도를 낮추면, 나는 남들의 박수에서 멀어진다. 속도를 낮추면, 나는 더 이상 남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삶을 살지 않게 된다. 속도를 낮추면, 나는 내 삶을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그리고 그게 바로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이다. 우리는 남들이 이해할 수 있는 삶을 살 때 안정감을 느낀다. 남들이 이해할 수 있는 삶은, 남들이 인정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삶은, 인정받을 가능성이 줄어든다. 그래서 속도를 낮추는 건, 인정받을 가능성을 일부러 줄이는 선택이다. 그건 생각보다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빨라질 수 있었음에도, 굳이 그러지 않기로 했다. 속도를 올리는 것은 더 높은 곳으로 가는 게 아니라, 더 깊은 곳에서 나를 잃는 방식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속도를 늦추는 선택은, 내 삶을 다시 내 손으로 가져오는 선택이었다. 남의 시간표에서 내 이름을 지우고, 내 시간표를 새로 쓰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왜냐하면 남의 시간표는 익숙하지만, 내 시간표는 낯설기 때문이다. 익숙한 불안은 견딜 수 있지만, 낯선 평온은 처음에는 불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결국 알게 되었다. 익숙한 불안 속에서 빠르게 사는 것보다, 낯선 평온 속에서 느리게 사는 것이 더 나를 살린다는 것을.

속도를 늦추자 불안이 사라진 게 아니라, ‘불안을 덮는 방식’이 사라졌다

느리게 살면 마음이 편해질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다. 속도를 늦추는 순간, 마음은 더 시끄러워진다. 왜냐하면 속도는 불안을 덮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내가 속도를 내던 시절에는 불안이 올라오면 곧바로 행동으로 바꿨다. 더 계획을 세우고, 더 공부하고, 더 일하고, 더 움직였다. 그렇게 하면 불안이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불안이 줄어든 게 아니었다. 불안을 볼 시간이 없어진 것뿐이었다. 불안은 해결되지 않았다. 불안은 단지 바쁜 일정 아래로 잠시 숨겨졌을 뿐이다. 그래서 속도가 멈추면, 불안은 더 큰 얼굴로 튀어나온다. 마치 “너 이제 나를 못 피하지?”라고 말하듯이.

나는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을 때,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이전에는 바쁘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괜찮아.” “나는 지금 움직이고 있으니까 괜찮아.” “나는 지금 노력하고 있으니까 괜찮아.” 하지만 속도를 늦추면 이런 말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속도를 늦춘 순간부터는, 내가 나를 증명하는 방식이 사라진다. 그러면 남는 건 아주 날것의 질문이다.
“그래서 너는 지금 괜찮은 거야?”
“너는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거야?”
“너는 지금 뒤처진 거 아니야?”
“너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너는 지금 뭐가 남았어?”

이 질문들은 내 목소리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내 안에 오래 저장된 사회의 목소리다. 타인의 시선이 내 안에서 내 목소리처럼 말하는 것이다. 나는 그 목소리를 너무 오래 ‘나’라고 착각해왔다. 그래서 속도를 늦추면 마치 내가 나를 배신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는 원래 열심히 살던 사람이잖아.” “너는 원래 부지런한 사람이잖아.” “너는 원래 결과를 만들어내던 사람이잖아.” 그 말들은 칭찬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나를 묶는 사슬이기도 했다. 나는 그 사슬을 끊는 과정에서 불안을 크게 겪었다. 왜냐하면 사슬이 끊기면, 자유가 오기 전에 공허가 먼저 오기 때문이다.

속도를 늦추는 과정에서 내가 가장 크게 배운 것은, 불안이 나쁜 감정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불안은 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불안은 종종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알려준다.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이 있을 때 불안해진다. 내가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있을 때 불안해진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있을 때 불안해진다. 그래서 불안을 무조건 없애려고 하면, 결국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까지 같이 없애게 된다. 중요한 건 불안을 없애는 게 아니라, 불안이 나를 끌고 가는 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불안이 올라와도, 그 불안이 곧바로 내 행동을 지배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예전의 나는 불안을 느끼면 즉시 속도를 올렸다. 불안은 곧바로 “더 빨리 해야 한다”로 번역됐다. 그런데 이 번역이 얼마나 위험한지 나는 이제 안다. 불안은 “더 빨리 해”가 아니라, 사실 “너는 지금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어”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말을 듣기 싫어서, 불안을 행동으로 바꿔버린다. 불안을 행동으로 바꾸면, 불안을 들여다볼 필요가 없다. 그래서 불안은 계속 남는다. 계속 남은 불안은 결국 더 큰 행동을 요구한다. 그래서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진다. 이게 ‘불안-속도-불안’의 악순환이다.

속도를 늦춘 이후에는 불안이 올라와도, 나는 그 불안을 곧바로 행동으로 바꾸지 않게 되었다. “불안하네. 그런데 이 불안이 말하는 건 무엇이지?” “내가 지금 두려워하는 건 진짜 실패일까, 아니면 남들의 평가일까?” “내가 지금 조급해지는 이유는 내가 부족해서일까, 아니면 기준이 남의 것이기 때문일까?” 이런 질문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그 질문이 가능해진 순간부터, 불안은 나를 몰아붙이는 폭군이 아니라, 내 마음을 알려주는 신호가 되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불안이 줄어드는 경험’을 했다. 그 경험은 속도를 올렸을 때의 불안 감소와는 완전히 달랐다. 속도를 올렸을 때의 불안 감소는 마취였다. 잠깐의 마취. 그래서 마취가 풀리면 더 큰 불안이 왔다. 하지만 속도를 늦추면서 불안을 해석하기 시작했을 때의 불안 감소는, 진짜 치료였다. 천천히, 느리게, 그러나 분명히 불안이 약해졌다. 왜냐하면 불안이 요구하는 것이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불안은 늘 나에게 “너 자신을 봐줘”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속도를 내느라 나를 보지 않았다. 속도를 늦추자 나는 나를 보기 시작했고, 그 순간 불안은 더 이상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되었다.

속도를 늦추는 선택은 결국 불안을 다루는 방식을 바꾸는 선택이었다. 불안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불안과 함께 살아도 무너지지 않는 구조를 만드는 선택이었다. 나는 그 구조를 만들기 위해 삶의 기준을 바꿨다. 이전에는 성과가 기준이었다. 성과가 있으면 괜찮고, 성과가 없으면 불안했다. 하지만 성과를 기준으로 살면, 삶은 늘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성과는 언제나 변하기 때문이다. 성과는 외부 요인에 의해 흔들리기 때문이다. 성과는 늘 더 높은 기준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성과 대신 리듬을 기준으로 삼기 시작했다.

리듬은 남과 비교할 수 없다. 비교할 수 없는 기준은 나를 불안에서 구해준다. 왜냐하면 비교할 수 없는 것은 경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경쟁이 되지 않는 삶은, 더 이상 타인의 타임라인에 종속되지 않는다. 나는 내 삶의 리듬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어떤 날에는 집중이 잘 되고, 어떤 날에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했다. 어떤 날에는 사람을 만나면 에너지가 올라오고, 어떤 날에는 혼자 있어야 회복된다는 것을 인정했다. 어떤 날에는 뭔가를 해내는 것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것이 더 큰 성과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 인정이 쌓이자, 나는 점점 더 안정된 사람이 되었다.

나는 속도를 늦추면서 오히려 더 단단해졌다. 느리게 살면서 더 불안해진 게 아니라, 불안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게 진짜 안정이었다. 안정은 불안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안정은 불안이 있어도 삶이 무너지지 않는 상태다. 속도를 늦추자 나는 처음으로 그 안정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 안정이 생기자, 나는 더 이상 속도를 올릴 이유가 없어졌다.

속도를 올리는 이유는 대부분 불안에서 나온다. 불안이 줄어들면, 속도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내가 원하는 건 빠른 삶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삶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삶은, 속도를 높여서 얻는 게 아니라 속도를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길러서 얻는 것이라는 것을.

속도를 올리지 않기로 한 건, ‘성장’이 아니라 ‘삶’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느린 선택을 하면 꼭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럼 성장 포기한 거야?” “그럼 욕심이 없는 거야?” “그럼 그냥 안정만 원하는 거야?” 이 질문은 겉으로는 중립적인 질문처럼 보이지만, 사실 안에는 이미 결론이 들어 있다. 빠른 사람은 성장하는 사람이고, 느린 사람은 성장을 멈춘 사람이라는 결론. 그래서 이 질문을 듣는 순간, 느리게 살기로 선택한 사람은 본능적으로 변명을 준비하게 된다. “아니야, 나도 성장하고 있어.” “나도 열심히 하고 있어.” “나도 계획이 있어.” 우리는 늘 이렇게 답한다. 왜냐하면 사회는 ‘성장’이라는 단어를 너무 오랫동안 속도와 묶어놨기 때문이다. 성장이라는 말은 원래 나무가 자라나는 것처럼, 시간이 쌓이며 자연스럽게 확장되는 의미를 갖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성장이라는 단어는 ‘빨리 커지는 것’과 동의어가 되었다. 그리고 빨리 커지는 것만이 성장이라고 믿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를 쉽게 실패자로 만들게 된다. 나는 그 실패를 오래 경험했다. 느리게 가는 동안 나는 계속 내 안에서 재판을 받았다. “너는 왜 이렇게 늦어?” “너는 왜 아직도 여기야?” “너는 왜 남들처럼 못 해?” 그 재판의 판사는 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 판사는 남들의 기준이었다. 사회가 만들어놓은 시간표가 내 안에서 내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내가 속도를 올리지 않기로 한 건, 그 재판을 끝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재판이 내 인생을 끝내기 전에 내가 먼저 재판장을 떠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속도를 올리면 나는 계속 재판장 안에 머무르게 된다. 증거를 제출해야 하고, 성과를 증명해야 하고, 남들보다 늦지 않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속도를 올리는 건, 사실 그 재판장 안에서 “나는 유죄가 아니야”라고 계속 외치는 행위와 비슷하다. 그런데 나는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내가 무죄를 증명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고 싶다고. 내가 평가받지 않아도 되는 기준을 갖고 싶다고. 그래서 나는 속도를 선택하지 않기로 했다. 그건 성장 포기가 아니라, 성장의 정의를 바꾸는 일이었다.

나는 ‘성장’이라는 단어를 다시 정의했다. 예전의 성장이라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늘어나는 것이었다. 더 많은 일을 처리하고, 더 높은 목표를 세우고, 더 빠른 속도로 결과를 내고, 더 넓은 네트워크를 만들고, 더 좋은 기회를 잡고, 더 큰 성취를 얻는 것. 이런 것들이 성장의 전부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 성장에는 한 가지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그 성장에는 삶이 없었다. 그 성장에는 내가 없었다. 그 성장에는 내가 살아가는 감각이 없었다. 오직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더 많은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가’만 남았다. 나는 그걸 성장이라고 불렀지만, 사실은 인간을 기계처럼 다루는 방식이었다. 인간은 기능이 늘어난다고 행복해지지 않는다. 기능이 늘어나는 것과 삶이 좋아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오히려 기능이 늘어날수록 삶이 더 얇아지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기능이 늘어나면, 더 많은 요구가 따라오기 때문이다. 기능이 늘어나면, 더 높은 기대가 따라오기 때문이다. 기능이 늘어나면, 더 많은 비교가 따라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능이 늘어나는 성장만을 목표로 하면, 인생은 끝없이 확장되는 요구 속에서 계속 쪼그라든다. 나는 그 모순을 오래 겪었다.

속도를 늦추면서 내가 얻은 것은, 기능이 아니라 감각이었다. 내 삶의 감각.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할 때 살아나는지, 무엇을 할 때 무너지는지. 이런 감각은 성과로는 증명할 수 없다. 하지만 감각이 없으면, 성과는 결국 나를 살리지 못한다. 감각이 없는 성과는, 결국 내가 누구인지 모른 채 얻는 결과가 된다. 그런 결과는 내 인생을 더 좋은 방향으로 데려가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더 멀리 데려간다. 나로부터 멀리. 내가 원하는 삶으로부터 멀리. 그래서 속도를 올리지 않기로 한 건, 성장을 포기한 게 아니라, 내가 나를 잃지 않는 성장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지점이 있다. 느리게 살기로 선택하면, 모든 게 편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느리게 살기로 선택하면 오히려 더 많은 책임이 생긴다. 왜냐하면 빠른 삶은 외부 기준이 삶을 끌고 가주기 때문이다. 남들의 시간표가 내 시간표가 되어주고, 사회가 정한 속도가 내 속도가 되어주고, 유행하는 성공 공식이 내 계획이 되어준다. 그래서 빠르게 살면, 오히려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구간이 많다. 그냥 따라가면 된다. 그냥 열심히 하면 된다. 그냥 남들이 하는 만큼 하면 된다. 그런데 느리게 살기로 선택하면, 그 순간부터는 내가 내 삶을 직접 설계해야 한다. 기준이 사라졌기 때문에, 내가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방향이 사라졌기 때문에, 내가 방향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이게 진짜 어렵다. 사람들은 빠르게 사는 게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더 어려운 건 느리게 사는 것이다. 느리게 사는 건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내 인생을 내가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남들의 시간표에 기대면, 적어도 실패했을 때 변명이라도 할 수 있다. “다들 그렇게 하잖아.” “그게 정석이잖아.” “그게 맞는 길이잖아.” 하지만 내 시간표를 만들면, 실패했을 때 변명할 곳이 없다. 오롯이 내가 선택한 삶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느리게 사는 건, 사실 도망이 아니라 정면돌파다. 내가 내 삶의 기준을 내 손으로 세우는 행위다.

나는 속도를 올리지 않기로 결심한 이후, 삶의 중심이 달라졌다. 이전에는 결과가 중심이었다. 결과가 나오면 기뻤고, 결과가 없으면 불안했다. 그래서 나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 삶을 조정했다. 잠을 줄이고, 감정을 무시하고, 관계를 줄이고, 내 몸의 신호를 무시하고, 마음이 보내는 경고를 무시했다. 결과를 위해 삶을 깎아내렸다. 그런데 속도를 올리지 않기로 결심한 이후에는 중심이 결과가 아니라 리듬이 되었다. 내가 어떤 리듬으로 살아야 오래 가는지, 내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무너지지 않는지, 내가 어떤 속도로 살아야 내 삶이 유지되는지. 이런 것들이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이 기준이 생기자 놀랍게도 삶은 더 멀리 갔다. 빨리 달릴 때보다 더 멀리 갔다. 왜냐하면 나는 더 이상 중간에 무너지는 방식으로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속도를 내던 시절의 나는 항상 ‘단거리 전력질주’를 했다. 한 번 달리면 엄청 달린다. 성과도 빨리 나온다. 사람들의 반응도 좋다. 스스로도 뿌듯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전력질주는 오래 못 한다. 결국 숨이 차고, 지치고, 마음이 무너지고, 몸이 망가지고, 관계가 무너지고, 의미가 사라진다. 그리고 나는 다시 멈춘다. 다시 공백이 생긴다. 다시 무너진다. 다시 회복한다. 다시 달린다. 내 인생은 이런 패턴이었다. 전력질주와 붕괴, 전력질주와 붕괴. 겉으로 보기엔 성장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반복이었다. 나는 앞으로 가는 게 아니라 같은 자리에서 달리고 있었다. 속도를 늦춘 이후 나는 처음으로 이 패턴을 끊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인생은 ‘단거리 성과’가 아니라 ‘장거리 지속’이 되었다.

여기서 내가 가장 크게 배운 건 이것이다. 성장은 속도에서 나오지 않는다. 성장은 지속에서 나온다. 그리고 지속은 속도를 낮춘다고 자동으로 생기는 게 아니라, 내가 내 삶의 구조를 바꿀 때 생긴다. 구조를 바꾸는 건, 내가 내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나는 속도를 늦추면서 내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바꿨다. 내 몸을 도구로 대하지 않기로 했다. 내 감정을 방해물로 대하지 않기로 했다. 내 관계를 효율의 관점에서 정리하지 않기로 했다. 내 하루를 성과의 관점에서 평가하지 않기로 했다. 이런 태도 변화는 겉으로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삶을 완전히 바꾸는 전환점이 된다. 왜냐하면 삶은 결국 태도로 굴러가기 때문이다.

속도를 올리지 않기로 한 이후, 나는 ‘선택’이라는 감각을 되찾았다. 예전에는 선택이 아니라 반응이었다. 불안하면 달리고, 비교하면 달리고, 뒤처졌다고 느끼면 달리고, 인정받고 싶으면 달렸다. 그런데 속도를 늦춘 이후에는 내가 반응하지 않게 되었다. 불안이 와도, 비교가 와도, 나는 그 감정에 즉시 끌려가지 않았다. 대신 선택할 수 있었다. “지금은 달리지 않겠다.” “지금은 쉬겠다.” “지금은 속도를 올리는 게 아니라 방향을 확인하겠다.” 이 선택은 단순한 마음가짐이 아니라, 삶의 힘이다.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삶을 주도한다.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은 삶에 끌려간다. 나는 속도를 늦추면서 주도권을 되찾았다. 그리고 그 주도권이 나를 조급함에서 구해줬다.

사람들은 조급함을 성격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원래 성격이 급해.” “나는 원래 조급해.” 하지만 조급함은 성격이 아니라 구조다. 비교하는 구조, 평가받는 구조, 성과로만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구조 속에 살면 누구나 조급해진다. 그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조급함은 계속 돌아온다. 나는 속도를 올리지 않기로 결심하면서 그 구조를 바꾸기 시작했다. 내 삶에서 비교 가능한 요소를 줄이고, 내 삶에서 타인의 기준이 들어오는 통로를 줄이고, 내 삶에서 ‘해야 한다’의 비중을 줄이고, 내 삶에서 ‘하고 싶다’의 비중을 늘렸다. 그러자 조급함은 줄어들었다. 줄어든 조급함은 내 삶을 더 넓게 만들었다. 조급함이 사라지면 시야가 넓어진다. 조급함이 사라지면 사람을 더 깊게 본다. 조급함이 사라지면 내 삶의 세부가 보인다. 조급함이 사라지면 내가 지금 가진 것들이 보인다. 속도를 내던 시절에는 내 삶이 늘 부족해 보였다. 하지만 속도를 늦추자, 내 삶은 부족한 게 아니라 이미 꽤 많이 쌓여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전환이 생긴다. 속도를 늦추면, 나는 더 이상 ‘결과로 나를 설득’하지 않게 된다. 예전에는 결과가 있어야 나를 인정할 수 있었다. 결과가 있어야 내가 괜찮다고 느꼈다. 결과가 있어야 내가 잘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속도를 늦추고 삶을 선택한 이후에는, 결과가 없어도 나는 나를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건 엄청난 변화다. 결과가 없는 상태에서도 나를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결과를 더 건강하게 다룰 수 있다. 결과가 없는 상태에서도 나를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실패해도 무너지지 않는다. 결과가 없는 상태에서도 나를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결과가 없는 상태에서도 나를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남들이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나는 이 변화를 통해 처음으로 ‘진짜 자존감’을 경험했다.

자존감은 “나는 잘할 수 있어”가 아니다. 자존감은 “나는 잘하지 못해도 괜찮아”에 더 가깝다. 그리고 이 자존감이 생기면, 속도는 더 이상 나를 지배하지 못한다. 속도는 단지 하나의 선택지가 된다. 내가 원하면 올릴 수 있고, 원하지 않으면 유지할 수 있다. 속도는 목적이 아니라 도구가 된다. 나는 그때부터 속도를 도구로 쓰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속도를 올리고, 어떤 때는 속도를 낮춘다. 하지만 중요한 건, 속도를 올리는 순간에도 내가 나를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속도를 올리면 곧바로 내가 나를 잃었다. 다시 남의 기준으로 움직였다. 다시 불안으로 달렸다. 다시 비교로 달렸다. 하지만 지금은 속도를 올려도, 나는 내 기준을 놓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속도를 올리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속도를 올리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은, 더 이상 조급함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조급함이 아니라 방향으로 움직인다. 방향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남들보다 늦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방향이 맞으면, 속도는 결국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속도가 느린 게 문제가 아니라, 방향이 없는 게 문제다. 나는 속도를 낮추면서 방향을 찾았다. 그리고 방향이 생기자 속도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이제 안다. 내가 예전처럼 빠르게 살 수 있는데도, 굳이 그러지 않기로 한 이유는 단순하다. 나는 더 이상 내 인생을 증명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더 이상 내 존재를 설득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더 이상 내 삶을 남들의 시간표에 맞추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내 삶을 살고 싶다. 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속도가 아니라 기준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기준은 결국, 내가 무엇을 지키고 싶은지에서 나온다.

내가 지키고 싶은 건 아주 구체적이다. 나는 내 마음의 평온을 지키고 싶다. 나는 내 몸의 신호를 지키고 싶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마음을 지키고 싶다. 나는 관계를 효율로 정리하지 않고,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태도를 지키고 싶다. 나는 내 하루가 결과로만 평가되지 않게 지키고 싶다. 나는 내 삶이 내 것이게 하고 싶다. 이걸 지키기 위해서는, 속도를 올리지 않는 선택이 필요했다.

속도를 늦추는 건 포기가 아니다. 속도를 늦추는 건 패배가 아니다. 속도를 늦추는 건 “나는 못 해”가 아니라 “나는 굳이 안 해”다. 그리고 이 “굳이 안 해”라는 문장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이 문장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자신의 삶을 주도하고 있다. 나는 이제 이 문장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빨라질 수 있는데도, 굳이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선택이 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이것이다. 나는 더 이상 내 인생을 ‘남들보다 늦다’는 말로 설명하지 않는다. 나는 내 인생을 ‘내 속도’라는 말로 설명한다. 남들보다 늦다는 말은 언제나 남을 기준으로 한다. 하지만 내 속도라는 말은 나를 기준으로 한다. 기준이 나에게 돌아오는 순간, 비교는 힘을 잃는다. 비교가 힘을 잃는 순간, 조급함은 사라진다. 조급함이 사라진 순간, 삶은 비로소 내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