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던 다른 경로들
오늘은 나만 늦다는 생각이 착각이었다는 걸 깨달은 경험에 대해 이야기 하러 해

사람이 어떤 감정에 오래 갇혀 있으면, 그 감정은 단순한 기분이 아니라 “사실”이 된다. 특히 ‘나만 늦었다’는 감정은 정말 그렇다. 이 감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단단해지고, 더 구체적인 근거를 붙이며, 결국에는 내 삶을 해석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버린다. 그리고 무서운 건, 이 감정이 나를 몰아세우는 방식이 굉장히 논리적이라는 점이다. 감정이면서도 논리처럼 작동한다. 그러니 사람은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다.
나는 오랫동안 내가 늦었다고 믿었다. 단지 늦었다는 정도가 아니라, “나만” 늦었다고 믿었다. 이 표현이 중요하다. 늦은 사람은 세상에 많다. 하지만 ‘나만 늦었다’는 생각은 나를 고립시키고, 나를 예외로 만들며, 나를 무능한 사람으로 확정해버린다. 늦는 것은 상황일 수 있지만, 나만 늦었다는 생각은 정체성이 된다. 그래서 그 생각은 나를 더 깊게 흔든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삶이 조금씩 다른 모양으로 펼쳐지고, 사람들을 더 다양하게 만나고, 무엇보다 내 삶을 조금 더 깊게 바라보게 되면서 나는 깨달았다. 나만 늦다는 생각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건 착각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세상이 내게 보여준 일부 장면을 내가 전체라고 오해한 결과였다. 나는 내 삶이 늦었다고 판단하기 전에, 내가 비교하고 있던 ‘기준’이 무엇인지부터 다시 봐야 했다. 그리고 그 기준이 얼마나 좁고, 얼마나 편집되어 있으며, 얼마나 불공정한지 알아야 했다.
이 글은 그 경험에 대한 기록이다.
내가 어떻게 ‘나만 늦다’는 생각을 믿게 되었는지,
그 생각이 어떻게 깨지기 시작했는지,
그리고 깨진 이후 내 삶이 어떤 방식으로 바뀌었는지.
이 글은 위로를 주기 위한 글이라기보다, 현실적인 관찰에 가깝다. 늦다는 감정은 누군가가 “괜찮아”라고 말해준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말이 더 공허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래서 나는 이 글에서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늦음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리고 그 감정을 벗어나는 데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실제 삶의 구조 안에서 설명해보려 한다.
“나만 늦었다”는 확신은 내 삶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든 착시였다
나는 한때 ‘늦음’이라는 단어를 거의 일상적으로 사용했다. 누군가가 물어보지 않아도 스스로에게 말했다. “나는 늦었어.” “나는 너무 늦었어.” “나는 왜 이렇게 늦었지?” 처음에는 그냥 한숨처럼 나오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반복되면서 점점 내 사고의 중심이 됐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늦었다는 말이 내 삶의 평가가 아니라 내 존재의 정의가 되기 시작했다.
늦었다는 생각이 처음부터 거대한 절망으로 시작되는 건 아니다. 대부분은 아주 사소한 비교에서 시작된다. 예를 들어 친구의 소식을 듣는다. 누군가는 좋은 회사에 취업했다. 누군가는 승진했다. 누군가는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누군가는 결혼했다. 누군가는 집을 샀다. 이런 이야기들은 원래는 축하할 일이지만, 내 마음이 불안정할 때는 축하가 아니라 비교의 재료가 된다. 그리고 비교는 늘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남들의 성취는 과장되고, 내 삶은 축소된다.
나는 그때 내 삶을 아주 좁게 보고 있었다. 내가 가진 것들, 내가 해낸 것들, 내가 버텨낸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내가 아직 가지지 못한 것들, 아직 해내지 못한 것들,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들만 보였다. 그러니 당연히 결론은 하나였다. “나는 늦었다.”
하지만 사실, 그 결론은 늦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시선이 편향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나는 내 삶을 전체로 보지 못했다. 나는 내 삶을 시간의 흐름과 맥락 속에서 보지 못했다. 나는 내 삶을 어떤 조건에서 살아왔는지, 어떤 환경을 지나왔는지,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지, 어떤 감정의 골짜기를 통과했는지, 그런 것들을 전부 삭제하고 결과만 비교했다. 그리고 결과만 비교하면 언제나 늦을 수밖에 없다. 특히 내가 비교하는 대상이 ‘겉으로 성공한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나만 늦었다’는 착시는 나를 매우 구체적인 방식으로 망가뜨렸다. 첫 번째는, 내가 내 삶을 설명하는 방식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내가 어떤 경험을 했는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중심으로 내 삶을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늦었다는 생각이 자리 잡은 뒤로는, 모든 경험이 “시간 낭비”로 변했다. 내가 쉬었던 시간은 회복이 아니라 게으름이 됐다. 내가 멈춘 시간은 생존이 아니라 실패가 됐다. 내가 돌아간 길은 재정비가 아니라 뒤처짐이 됐다. 내 삶은 더 이상 내가 살아낸 시간이 아니라, 남들보다 늦어진 이유를 설명하는 변명처럼 변했다.
두 번째는, 내 감정이 점점 더 단단하게 굳었다는 점이다. 늦었다는 생각은 단지 불안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불안은 결국 자존감의 붕괴로 이어진다. 사람은 스스로를 계속 늦었다고 판단하면, 그 늦음의 원인을 찾게 된다. 그리고 그 원인은 대부분 나 자신으로 귀결된다. “내가 게을러서.” “내가 부족해서.” “내가 무능해서.” “내가 멍청해서.” “내가 의지가 약해서.” 이렇게 늦음은 구조나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내 인격의 문제로 바뀐다. 그리고 이 순간부터 늦음은 단순한 상태가 아니라, 나를 공격하는 언어가 된다.
세 번째는, 나를 더 조급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조급함은 늦음의 결과가 아니라, 늦음의 착시가 만들어낸 반응이다. 나는 늦었다는 생각을 없애기 위해 더 빨리 가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더 빨리 가려면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더 많은 에너지를 쓰려면 더 강한 압박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나를 더 혹독하게 다뤘다. “빨리 해야 해.” “지금 이러면 안 돼.” “지금 쉬면 끝이야.” “지금 멈추면 영원히 못 따라가.” 이런 말들은 나를 움직이게 만들긴 했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건강한 동력이 아니라 공포에 기반한 동력이었다. 공포로 움직이는 사람은 오래 가지 못한다. 결국 나는 번아웃을 겪었다. 번아웃은 내 삶을 다시 멈추게 했다. 그리고 그 멈춤은 또다시 늦었다는 확신을 강화했다. 완벽한 악순환이었다.
그 악순환 속에서 나는 늘 비슷한 생각을 했다. “나는 왜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결과가 없지?” “나는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왔는데도 남들만큼 못하지?” “나는 왜 이렇게 멀리 왔는데도 아직도 여기지?” 이런 질문들은 사실 질문이 아니라 자기비난이었다. 이미 답이 정해진 질문이었다. “너는 부족해.” “너는 늦었어.” “너는 실패했어.” 이 답을 확인하기 위해 질문을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그때 몰랐다. 내가 비교하고 있는 대상이 얼마나 편집된 대상인지. 그리고 내가 비교하고 있는 내 삶이 얼마나 편집되지 않은 전체인지. 사람들은 남들의 결과만 본다. 남들의 하이라이트만 본다. 남들의 “좋아 보이는 순간”만 본다. 하지만 나는 내 삶의 모든 순간을 알고 있다. 내 삶의 피로, 불안, 실패, 실수, 흔들림, 회복, 우회, 멈춤, 모든 걸 알고 있다. 그 상태에서 남들의 하이라이트와 내 전체를 비교하면, 나는 항상 늦을 수밖에 없다. 늦음은 사실이 아니라 비교 방식의 결과다.
이 사실을 깨닫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여전히 늦었다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왜냐하면 사회는 늦음이라는 감정을 매우 쉽게 강화하는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는 속도를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한다. 속도는 숫자로 측정하기 쉽고, 비교하기 쉽고, 순위를 매기기 쉽다. 그래서 사회는 사람을 속도로 줄 세운다. 그리고 그 줄은 언제나 한 방향으로만 움직인다. 빠른 사람이 앞에 서고, 느린 사람은 뒤에 선다. 그 구조 안에서는 느린 사람에게 주어지는 말이 정해져 있다. “너는 늦었다.”
하지만 그 구조에서 중요한 건, 그 줄이 실제로 존재하는 줄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들의 삶은 줄이 아니다. 사람들의 삶은 복잡한 길이다. 어떤 사람은 돌아가고, 어떤 사람은 멈추고, 어떤 사람은 뛰고, 어떤 사람은 잠시 쉬고, 어떤 사람은 다른 방향으로 튼다. 그런데 사회는 그 복잡함을 견디지 못한다. 사회는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만들고 싶어 한다. 그래서 삶을 한 줄로 만든다. 그리고 그 줄에서 벗어난 사람에게 “늦었다”고 말한다.
나는 그 줄을 너무 오래 믿었다.
그래서 나는 내 삶을 너무 오래 의심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흔들림은 대단한 사건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경험으로 시작됐다.
나는 어느 날, 겉으로 보기엔 완벽하게 앞서 있는 사람과 진짜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그 사람은 내가 부러워하던 조건을 거의 다 갖고 있었다. 좋은 회사, 안정적인 직장, 사회적 인정, 주변의 부러움. 그런데 그 사람이 나에게 조용히 말했다.
“나는 사실 매일 무서워.”
“나는 지금 이게 맞는지 모르겠어.”
“나는 계속 불안해.”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췄다.
내 머릿속에는 하나의 질문이 떠올랐다.
“저 사람도 불안해?”
그 질문은 단순했지만, 내 세계를 흔들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동안 불안은 뒤처진 사람만 갖는 감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불안은 늦은 사람의 감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 나는 처음으로 알게 됐다.
불안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방향과 관계된 감정이라는 걸.
그 사람은 빠르게 가고 있었지만, 방향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느리게 가고 있었지만, 방향을 찾고 있었다.
그 차이는 겉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삶에서는 아주 큰 차이를 만든다.
그때부터 나는 아주 천천히, 정말로 천천히 ‘나만 늦었다’는 생각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의심이라는 건 믿음이 깨지는 첫 단계다. 믿음이 깨지는 건 갑자기 일어나지 않는다. 믿음은 천천히 균열이 생기고, 그 균열 사이로 다른 가능성이 들어온다. 그리고 그 가능성이 커질수록 믿음은 무너진다.
내가 의심하기 시작한 것은 단 하나였다.
“내가 늦었다고 판단하는 기준은 정말 절대적인가?”
보이지 않던 다른 경로들이 보이기 시작한 순간: 나는 늦은 게 아니라 다른 길 위에 있었다
‘나만 늦었다’는 생각이 착각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내 삶은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외부에서 일어난 변화가 아니라 내 시선에서 일어난 변화였다. 시선이 바뀌면 삶이 달라진다. 같은 삶이라도 해석이 달라지고, 해석이 달라지면 감정이 달라지고, 감정이 달라지면 행동이 달라진다.
나는 처음으로 내 삶을 “경로”라는 관점에서 보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삶이 하나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길은 사회가 정해준 길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하고
경력을 쌓고
승진하고
돈을 모으고
안정적인 생활을 만들고
이 흐름에서 벗어나면 늦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늦은 사람은 결국 뒤처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생각은 너무 당연하게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어서, 나는 그것이 하나의 ‘가정’이라는 사실조차 몰랐다. 나는 그것이 그냥 현실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경로라는 관점에서 보니, 그 길은 하나가 아니었다.
길은 많았다.
너무 많아서 오히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좁은 길만 보고 있었는지 알게 됐다.
내가 보지 못했던 길들은 대개 이런 이유로 보이지 않았다.
첫째, 사회가 그 길을 잘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는 표준 경로를 더 자주 보여준다. 표준 경로는 설명하기 쉽고, 시스템이 지원하기 쉽고, 평가하기 쉽기 때문이다. 학교도, 회사도, 가족도, 친구들도 대부분 표준 경로를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그래서 표준 경로는 계속 강화된다.
둘째, 사람들은 자신의 우회와 실패를 잘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결과를 말한다. 성취를 말한다. 성공을 말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얼마나 흔들렸는지, 얼마나 멈췄는지, 얼마나 울었는지, 얼마나 불안했는지, 그런 이야기는 잘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남들의 경로를 볼 때, 경로가 아니라 결과만 보게 된다.
셋째, 나 자신이 다른 길을 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길을 보는 것이 두려웠다. 다른 길이 있다는 걸 인정하면, 내가 지금까지 믿어온 기준이 무너진다. 그리고 기준이 무너지면, 나는 어디에 서 있는지 모르게 된다. 그 불확실함이 무서워서, 나는 오히려 표준 경로를 더 붙잡았다. “이게 정답이야.” “이 길이 맞아.” “다들 이렇게 살아.” 그렇게 말하면서 내 불안을 달랬다.
하지만 그 불안은 달래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커졌다.
왜냐하면 내 삶은 이미 표준 경로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나는 이미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길을 걷는다고 해서 반드시 불행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다른 길을 걷는 사람들은 실제로 존재했다. 그리고 그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다만 내가 그들을 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나는 조금씩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조금씩 내 주변의 범위를 넓히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놀랐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경로가 있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취업이 늦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늦은 대신 자신이 원하는 분야를 찾았다.
어떤 사람은 승진이 느렸다.
하지만 그 사람은 느린 대신 자신만의 전문성을 만들었다.
어떤 사람은 몇 년을 쉬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쉰 대신 삶의 방향을 다시 잡았다.
어떤 사람은 여러 번 실패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실패한 대신 자신이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 확실히 알게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사람들의 삶이 결코 “망한 삶”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오히려 그 사람들의 삶은
표준 경로를 그대로 탄 사람들보다
더 단단해 보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 번 이상 삶을 다시 선택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표준 경로를 그대로 타는 삶은, 사실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흘러가면 된다. 시스템이 밀어준다. 주변이 밀어준다. 가족이 밀어준다. 친구들이 밀어준다. 사회가 밀어준다. 그래서 사람은 별로 선택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앞으로 간다.
하지만 표준 경로에서 벗어난 삶은 선택이 필요하다.
어디로 갈지, 어떤 속도로 갈지, 무엇을 포기할지, 무엇을 지킬지, 무엇을 믿을지, 무엇을 버릴지. 그런 선택을 계속 해야 한다. 그래서 그 삶은 더 불안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삶은 더 주체적이다. 더 자기 삶이다.
나는 그 차이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내 삶의 해석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내가 멈춘 시간이 “늦어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시간이 “회복”이었다.
예전에는 내가 돌아간 길이 “실패”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 길이 “재정비”였다.
예전에는 내가 늦게 시작한 것이 “약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늦음이 “신중함”이었다.
이 변화는 단순히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는 수준이 아니었다.
내 삶을 바라보는 기준이 바뀌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기준 변화는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도 바꿨다.
나는 이제 남들의 삶을 볼 때, 단순히 “빠르다/느리다”로 보지 않는다.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조건에서 출발했는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어떤 비용을 치렀는지, 어떤 방향을 가고 있는지, 그런 것들을 생각하게 됐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빠르게 성공했다면 예전의 나는 부러움과 열등감만 느꼈다. “나는 왜 저렇게 못하지?”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조금 더 복잡해졌다.
“저 사람은 어떤 조건이 있었을까?”
“저 사람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저 사람은 어떤 비용을 치렀을까?”
“저 사람은 그 속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저 사람은 지금 행복할까?”
이 질문들은 남을 평가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나를 비교에서 꺼내기 위한 질문이다. 비교는 언제나 단순한 결론을 만든다. “나는 부족하다.” 하지만 질문은 복잡한 현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현실이 복잡해질수록 비교는 힘을 잃는다.
나는 이 과정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됐다.
세상에는 “정답 경로”가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자주 보이는 경로”가 있을 뿐이라는 걸.
자주 보이는 경로는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경로를 따라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경로가 내게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내게 맞지 않은 경로를 억지로 따라가면,
나는 결국 더 늦어질 수도 있다.
이건 중요한 역설이다.
사람들은 늦지 않기 위해 표준 경로를 따라가지만,
표준 경로가 맞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경로가 오히려 더 큰 늦음을 만든다.
왜냐하면 그 경로에서 버티다가 무너지고,
무너진 뒤 회복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회복한 뒤 다시 방향을 잡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실을 내 삶으로 경험했다.
나는 한때 표준 경로를 따라가려고 무리했다.
그 결과 나는 번아웃을 겪었다.
그리고 번아웃 이후 나는 한동안 멈췄다.
그 멈춤이 내게는 늦음으로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니,
그 멈춤은 늦음이 아니라
내 삶을 다시 살기 위한 필수 과정이었다.
만약 내가 그 멈춤 없이 계속 갔다면,
나는 더 빨리 망가졌을 것이다.
그러니 그 멈춤은
늦음이 아니라
나를 살린 선택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늦음이라는 단어를 다시 정의하기 시작했다.
늦음은
남들보다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이 나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태다.
그리고 진짜 늦음은
속도가 느린 게 아니라
나를 잃어버린 채로 가는 것이다.
이 정의를 갖게 된 이후
나는 처음으로 다른 경로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경로들은
생각보다 훨씬 다양했다.
어떤 경로는
빠르게 시작하지만 중간에 멈춘다.
어떤 경로는
느리게 시작하지만 꾸준히 간다.
어떤 경로는
한 번 크게 실패한 뒤 완전히 방향을 바꾼다.
어떤 경로는
몇 년 동안 준비만 하다가 갑자기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어떤 경로는
계속 흔들리지만 끝내 자신에게 맞는 자리로 간다.
이 모든 경로는
표준 경로가 아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경로는
삶이다.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조금씩 평온해졌다.
늦음이 착각이었다는 걸 진짜로 받아들인 이후: 속도 대신 “삶의 질”을 기준으로 살기 시작했다
‘나만 늦었다’는 생각이 착각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해서
그 순간부터 모든 불안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사람은 머리로 깨달은 뒤에도
감정으로는 한참을 더 살아야 한다.
나는 한동안 계속 흔들렸다.
“그래도 나는 늦은 거 아닐까?”
“그래도 나는 지금 이 정도면 너무 뒤처진 거 아닐까?”
“그래도 나는 뭔가를 빨리 해야 하지 않을까?”
이 질문들은 여전히 내 안에서 살아 있었다.
하지만 달라진 점이 있었다.
예전에는 그 질문이 나오면
나는 즉시 무너졌다.
그 질문이 사실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는
그 질문이 나와도
그 질문을 그대로 믿지 않게 됐다.
나는 그 질문을 하나의 ‘반응’으로 보기 시작했다.
불안이 만들어낸 반응.
사회가 심어놓은 기준이 만들어낸 반응.
내가 오래된 비교 습관에서 자동으로 나오는 반응.
그리고 그 반응이 나올 때마다
나는 내 삶의 기준을 다시 세웠다.
내 삶의 기준은
속도가 아니라
삶의 질이었다.
삶의 질이라는 말은 흔하지만,
나는 이 말을 아주 구체적으로 정의해야 했다.
삶의 질이란
내가 얼마나 안정적인 상태로 살아갈 수 있는지,
내가 얼마나 나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지,
내가 얼마나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그런 것들이었다.
나는 예전처럼
한 번에 크게 성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지속 가능한 삶을 목표로 한다.
1) 속도보다 중요한 건 “내가 무너지지 않는 속도”였다
나는 한때 빨리 가는 걸 목표로 했다.
하지만 빨리 가는 것은 언제나 나를 무너뜨렸다.
나는 내 성격상, 내 체력상, 내 마음의 구조상
속도를 무리하게 올리면 반드시 무너졌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내 삶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
예전의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나는 인정하면 패배라고 생각했다.
나는 인정하면 나약함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인정하면 더 늦어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내가 무너지는 속도로 가는 건
늦지 않기 위해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더 늦어지게 만든다.
반대로
내가 무너지지 않는 속도로 가는 건
처음에는 느려 보이지만,
결국 더 멀리 가게 만든다.
이건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이었다.
2) 비교의 기준을 바꾸자, 늦음이 사라졌다
늦음이라는 감정은
절대적인 시간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늦음은
비교에서 생긴다.
나는 그동안 나를
남들의 타임라인과 비교했다.
남들은 이 나이에 이 정도인데
남들은 이 시기에 이 정도인데
남들은 이 연차에 이 정도인데
이 비교는 끝이 없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언제나 더 빠른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비교의 기준을 바꿨다.
나는 나를
과거의 나와 비교하기 시작했다.
나는 1년 전보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나는 6개월 전보다 무엇이 단단해졌는가
나는 3개월 전보다 무엇이 안정되었는가
이 비교는 나를 살렸다.
왜냐하면 이 비교는
나를 성장시키는 비교이기 때문이다.
남들과 비교하는 순간
나는 항상 부족하다.
하지만 과거의 나와 비교하면
나는 분명히 성장하고 있다.
그 성장은 속도가 느릴 수도 있다.
하지만 성장은 성장이다.
그리고 그 성장을 확인할 수 있을 때
늦음이라는 감정은 힘을 잃는다.
3) 나는 늦은 사람이 아니라, “나를 다시 만드는 사람”이었다
이 문장을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나는 오랫동안
내 삶이 망가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알게 됐다.
내 삶은 망가진 것이 아니라
재구성 중이었다.
나는 한 번도
완벽한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건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사람의 삶은 완벽하지 않다.
다만 어떤 사람들은
그 불완전함을 숨기고,
어떤 사람들은
그 불완전함을 드러내고,
어떤 사람들은
그 불완전함을 견디면서 다시 만든다.
나는 그중에서
“다시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다시 만드는 사람은
당연히 시간이 걸린다.
다시 만드는 사람은
당연히 느리다.
하지만 다시 만드는 사람은
결국 더 단단해진다.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늦음이라는 감정이
점점 더 사라지는 걸 느꼈다.
4) 늦음이 사라지자, 불안도 달라졌다
불안이 완전히 없어지진 않았다.
하지만 불안의 성격이 바뀌었다.
예전의 불안은
나를 공격하는 불안이었다.
“너는 늦었어.”
“너는 뒤처졌어.”
“너는 실패했어.”
“너는 못해.”
이 불안은 나를 무너뜨렸다.
하지만 지금의 불안은
나를 조정하는 불안이다.
“지금 이 속도가 괜찮은가?”
“지금 이 방향이 맞는가?”
“지금 내 상태가 건강한가?”
이 불안은
나를 망가뜨리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살린다.
나는 불안을 없애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불안을 관리하려 한다.
불안은
내 삶이 중요한 방향을 향하고 있을 때
자주 나타난다.
그러니 불안은
없애야 할 적이 아니라
조정해야 할 신호가 된다.
이 관점은
내 삶을 훨씬 더 안정적으로 만들었다.
나는 이제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늦었다고 믿었던 시절은, 사실 내가 내 삶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내 삶의 전체를 보지 못했다.
나는 내 삶의 맥락을 보지 못했다.
나는 내 삶의 조건을 보지 못했다.
나는 내 삶의 회복을 보지 못했다.
나는 내 삶의 선택을 보지 못했다.
나는 오직 남들의 결과만 봤다.
그리고 그 결과와 내 현재를 비교했다.
그 비교는
나를 늦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내 삶을 더 넓게 본다.
나는 내 삶의 전체를 본다.
나는 내 삶이 단순히 늦은 것이 아니라
복잡한 경로를 지나온 것이라는 걸 안다.
나는 내 삶이 단순히 뒤처진 것이 아니라
다른 방향을 선택한 것이라는 걸 안다.
나는 내 삶이 단순히 실패한 것이 아니라
다시 만드는 과정이라는 걸 안다.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속도를 포기하고
방향을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방향을 선택하는 순간
늦음은 의미를 잃는다.
늦음은
속도의 언어다.
하지만 방향은
삶의 언어다.
나는 이제
속도의 언어가 아니라
삶의 언어로 살고 싶다.
나는 이제
남들의 타임라인이 아니라
내 타임라인을 살고 싶다.
나는 이제
늦어도 괜찮다는 말이 아니라
늦음이 애초에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내 삶으로 증명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