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령·경력 기준에서 자유로워진 경험
오늘은 지금쯤은 여기 있어야 한다 는 생각을 내려놓은 날에 대해 이야기 하러 해

“지금쯤은…”이라는 말이 내 인생을 조용히 조여오던 방식
나는 한동안 어떤 선택을 하든, 어떤 하루를 보내든, 머릿속에 늘 같은 문장이 떠올랐다.
“지금쯤은 여기 있어야 하는데.”
이 말은 누가 직접 내게 던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내 안에서는 너무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내 생각이었던 것처럼, 마치 내가 원래부터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믿어온 것처럼.
그 문장은 늘 ‘현재’를 평가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위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하지 않았다. 대신 지금의 나를 ‘기준’과 비교하게 만들었다. 그 기준은 정해져 있었다. 나이, 경력, 사회가 기대하는 평균치, 주변 사람들이 보여주는 속도. 그리고 그 기준이 내 삶에 들어오는 순간, 나는 내가 가진 것보다 내가 아직 가지지 못한 것을 먼저 보게 되었다.
예를 들어, 같은 나이의 누군가가 이미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고 있을 때,
나는 내 현재를 “아직도 방황 중”으로 규정했다.
누군가가 몇 년 차에 팀장이 되었을 때,
나는 내 경력을 “제자리걸음”으로 정의했다.
누군가가 결혼하거나 집을 샀을 때,
나는 내 삶을 “뒤처짐”으로 번역했다.
이렇게 내 삶은 계속 번역되었다.
나의 현실이 나의 언어로 설명되지 않고, 남들의 시간표로 번역되는 삶이었다.
나는 이 번역이 얼마나 잔인한지 늦게 알았다.
왜냐하면 번역된 삶은 항상 부족해 보이기 때문이다.
내 삶이 어떤 노력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내가 어떤 환경에서 어떤 선택을 해왔는지, 내가 어떤 상처를 겪었고 어떤 회복을 거쳤는지는 번역 과정에서 모두 지워진다. 남는 건 오직 하나다.
“평균보다 늦음.”
“정상 속도보다 느림.”
“기대치보다 부족함.”
이런 평가가 반복되면 사람은 두 가지 방식으로 무너진다.
하나는 자신을 더 몰아붙이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포기하는 방식이다. 나는 두 가지를 모두 경험했다.
나는 한때 정말 미친 듯이 몰아붙였다.
내가 뒤처졌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 뒤처짐을 만회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속도를 만들었다. 남들처럼 보이기 위해, 남들처럼 살기 위해, 남들처럼 “지금쯤은 여기 있어야 한다”는 기준을 맞추기 위해.
그런데 속도를 올릴수록, 마음은 더 불안해졌다.
이상하게도 더 열심히 할수록 불안이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불안은 더 정교해졌다.
“이렇게 해도 늦는데?”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부족한데?”
“그럼 나는 도대체 뭐지?”
그때부터 나는 점점 자기 확신을 잃어갔다.
내가 뭘 원하는지, 내가 뭘 잘하는지,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보다
‘지금쯤은’이라는 기준을 맞추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그 기준은 결국 내 마음을 갉아먹었다.
나는 내가 가진 것들을 즐기지 못했고, 내가 해낸 것들을 인정하지 못했다.
작은 성취가 생겨도 기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성취는 항상 ‘기준에 비해’ 작았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감각 속에서 살았다.
그렇게 살다 보면 삶은 이상한 방향으로 굳어간다.
내가 선택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선택이 아니다.
그저 ‘늦지 않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무서운 건,
내가 나를 사람이 아니라 스펙처럼 대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나는 내 감정을 고려하지 않았고, 내 상태를 존중하지 않았으며, 내 삶의 리듬을 무시했다.
나는 오직 “지금쯤은…”이라는 기준을 맞추기 위해 나를 갈아 넣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기준이 내 안에서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날은 아주 특별한 날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평범해서 기억에 오래 남는다.
나는 그날도 평소처럼 ‘내가 늦었다’는 생각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그리고 평소처럼 나 자신을 평가하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그 평가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다.
마치 내가 계속 들고 있던 자가 갑자기 부러진 것처럼,
그 기준이 의미를 잃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내 안에서 처음으로 이런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지금쯤 여기 있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지금 여기 있는 사람이다.”
이 문장은 너무 단순했지만, 내 삶을 바꾸는 문장이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연령과 경력 기준이 내 삶을 얼마나 왜곡해왔는지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인정했다.
나는 늦은 게 아니라,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었던 것이라고.
연령·경력 기준이 무너진 자리에서 드러난 진짜 현실: 내가 겪어온 시간들
사람들은 늦음을 말할 때, 그 사람의 과거를 지운다.
“몇 살인데 아직?”
“몇 년 차인데 아직?”
이 말은 단순한 질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판결이다.
그 판결 속에는 “너는 정해진 시간표를 따라야 한다”는 전제가 숨어 있다.
하지만 삶에는 정해진 시간표가 없다.
정해진 시간표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은 운이 좋은 사람들의 평균이거나
보여지는 사람들의 표본일 뿐이다.
나는 그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왜냐하면 마음은 숫자를 믿기 때문이다.
나이, 연차, 월급, 직급, 성과.
이 숫자들은 비교하기 쉬워서, 사람을 더 잔인하게 만든다.
나는 내 삶을 숫자로 정리하면서 계속 나를 낮춰왔다.
내가 얼마나 버텨왔는지, 내가 얼마나 회복했는지, 내가 얼마나 힘든 환경에서 여기까지 왔는지는 숫자로 표현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이와 경력은 숫자로 표현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숫자를 기준으로 나를 판단하고,
나는 그 판단을 내 기준으로 착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내 과거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늦은 게 아니라, 내가 지나온 시간이 너무 많았던 것이라는 걸.
남들은 20대에 경력을 쌓을 때,
나는 내 마음을 지키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남들은 앞만 보고 달릴 때,
나는 뒤에서 무너진 자신을 주워 담고 있었다.
남들은 성과를 만들 때,
나는 생존을 하고 있었다.
이 말은 피해자 코스프레가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일이다.
내가 늦은 이유는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내가 감당해야 했던 삶의 무게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인정은 내 삶을 처음으로 정확하게 보게 만들었다.
정확하게 보는 순간, 비교는 힘을 잃는다.
비교는 맥락을 지우기 때문에 성립하는데,
내 맥락을 정확히 보기 시작하면 비교는 더 이상 공정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나는 내 과거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나는 왜 이 길을 돌아왔는가?”
“나는 왜 이 속도로밖에 못 갔는가?”
이 질문을 자책이 아니라 이해로 바꾸는 작업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깨달았다.
나는 나를 몰아붙이기 위해 “지금쯤은…”을 사용해왔지만,
사실 그 문장은 내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문장은 행동을 만들어내는 말이 아니라,
자기혐오를 만들어내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쯤은…”이라는 말은
오늘의 나를 부정한다.
지금의 나를 인정하지 못하게 만든다.
지금의 나를 설명할 기회를 빼앗는다.
그리고 더 무서운 건,
그 말이 내 안에 깊이 들어오면
나는 내가 가진 것들을 누리지 못하고
내가 해낸 것들을 인정하지 못하고
내가 살아남은 것조차 가치 없다고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나는 그 지점까지 갔었다.
어느 날은 정말로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이렇게까지 살았는데도 왜 아직 이 정도지?”
그 말 속에는 내가 살아온 시간이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어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결심했다.
이제는 연령과 경력 기준을 내 삶에서 걷어내기로.
이 결심은 단순한 자기 위로가 아니었다.
그건 내 삶을 다시 설계하는 일이었다.
기준이 바뀌면 선택이 바뀐다.
선택이 바뀌면 삶이 바뀐다.
나는 연령 기준 대신 다른 기준을 세우기 시작했다.
내가 이 선택을 했을 때 더 안정적인가
내가 이 일을 했을 때 더 지속 가능한가
내가 이 관계를 유지했을 때 내 마음이 건강한가
내가 이 방향으로 갔을 때 나를 더 존중할 수 있는가
이 기준들은 남들이 보기엔 너무 느슨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내 삶을 지키는 기준이었다.
그리고 이 기준들이 생긴 이후,
나는 처음으로 ‘늦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늦음은 더 이상 실패의 증거가 아니었다.
늦음은 내가 나를 지키며 살아왔다는 흔적이었다.
“나는 내 속도로 가도 된다”는 확신이 생긴 이후, 삶이 달라진 방식
연령·경력 기준에서 자유로워진 이후, 내 삶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건 결과가 아니었다.
가장 크게 달라진 건 나를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이전의 나는 늘 나를 평가했다.
평가는 항상 비교에서 시작된다.
나는 남들과 비교했고, 남들의 속도와 내 속도를 비교했고, 남들의 결과와 내 결과를 비교했다.
그 비교는 나를 늘 부족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비교를 내려놓자, 나는 나를 평가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나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평가와 관찰은 완전히 다르다.
평가는 나를 깎아내리지만, 관찰은 나를 이해한다.
평가는 나를 몰아붙이지만, 관찰은 나를 조정한다.
나는 나를 관찰하면서 알게 되었다.
나는 무조건 빠르게 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건 단점이 아니라 특성이었다.
나는 빠르게 달릴 때 성과가 나오는 사람이 아니라,
천천히 쌓을 때 더 오래 가는 사람이었다.
나는 단기간의 폭발보다, 장기적인 지속에 강한 사람이었다.
이 사실을 인정한 순간, 나는 내 삶을 다시 설계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왜 나는 남들처럼 못하지?”라는 질문을 했다면,
이제는 “나는 어떤 방식으로 가장 잘할 수 있지?”라는 질문을 했다.
질문이 바뀌자, 삶이 달라졌다.
나는 더 이상 조급하지 않았다.
조급함은 남들 일정표가 있을 때만 생긴다.
남들 일정표가 사라지면 조급함은 갈 곳을 잃는다.
나는 더 이상 스스로를 자책하지 않았다.
자책은 기준이 있을 때 생긴다.
그 기준이 내 것이 아니라고 인정하면 자책은 힘을 잃는다.
나는 더 이상 내 삶을 숨기지 않았다.
예전에는 내 속도가 부끄러워서, 내 선택이 부끄러워서, 내 상황이 부끄러워서 숨기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숨길 필요가 없었다.
내 삶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가장 큰 변화는 이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내 삶을 증명하려고 살지 않게 되었다.
예전에는 늘 증명하고 싶었다.
내가 뒤처지지 않았다는 걸.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내가 노력하고 있다는 걸.
내가 실패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하지만 이제는 증명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 삶은 증명 대상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증명하려는 삶은 늘 피곤하다.
남들의 시선을 이겨야 하고, 남들의 기준을 맞춰야 하고, 남들의 평가를 통과해야 한다.
그런 삶은 결국 나를 소진시킨다.
나는 그 소진을 너무 오래 겪었다.
그래서 이제는 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평균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나를 잃지 않는 것이라는 걸.
연령·경력 기준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나는 비로소 내 삶을 제대로 살 수 있었다.
내가 늦게 가도 괜찮다는 확신은
“나는 남들보다 못해도 괜찮다”는 포기가 아니었다.
그 확신은
“나는 내 속도로 가야만 제대로 갈 수 있다”는
가장 현실적인 결론이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지금쯤은 여기 있어야 하는데”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 말은 내 삶을 망가뜨리는 말이었다.
대신 나는 이런 말을 한다.
지금 여기서 시작해도 된다
지금 여기서 다시 해도 된다
지금 여기서 천천히 가도 된다
지금 여기서 내가 나를 지키며 가도 된다
이 말들은 나를 움직이게 한다.
나를 살게 한다.
나를 지속하게 한다.
그리고 결국, 나를 앞으로 데려간다.
나는 이제 늦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늦음은 내 삶의 실패가 아니라,
내 삶이 나를 지키며 여기까지 왔다는 증거다.
남들보다 늦게 가도 괜찮다는 확신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긍정이 아니라
내 삶을 정확히 이해했을 때 생기는 진짜 현실감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 현실감 위에서 살고 있다.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느리지만 끊기지 않게.
내 삶은 이제 남들 시간표에 맞춰지는 삶이 아니라,
내가 살아낼 수 있는 속도로 만들어지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