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보다 안정이 중요해진 계기
오늘은 늦게 시작했지만 조급하지 않았던 유일한 이유에 대해 이야기 하러 합니다.

늦어졌다는 사실보다, 무너질 수 있다는 감각이 더 먼저 왔다
나는 분명 늦게 시작한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까지도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는 ‘아직 늦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설득했고, 그다음에는 ‘남들도 다 각자 사정이 있다’는 말로 비교를 흐렸다. 하지만 어느 순간, 더 이상 그 말들이 나를 안심시키지 못했다. 늦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마음 한구석에서 계속해서 나를 압박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압박은 나를 앞으로 밀어붙이지 않았다. 흔히 말하듯 “늦었으니까 더 빨리 해야지”라는 결론으로 가지 않았다. 대신 내 안에서는 전혀 다른 감각이 먼저 올라왔다. ‘이 상태로 서두르면 다시 무너질 수 있다’는 감각이었다.
나는 이미 한 번, 충분히 버티지 못한 채 속도를 냈던 적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준비보다 의지가 중요하다고 믿었다. 몸과 마음이 따라오지 않는다는 신호를 무시했고, 그 신호를 ‘나약함’으로 해석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말들도 비슷했다. “조금만 더 하면 된다”, “이 정도는 다 견뎌야 한다”, “지금 포기하면 평생 후회한다.” 그 말들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나 자신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결국 나는 무너졌다. 단번에 쓰러진 것도 아니었다. 조금씩, 아주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무너졌다. 집중력이 사라졌고, 작은 일에도 쉽게 지쳤으며, 스스로를 다그치는 말만 늘어갔다. 그 과정에서 가장 괴로웠던 건 실패 그 자체가 아니라, 왜 이렇게까지 힘든지 설명할 수 없다는 감각이었다. 분명 다들 “그 정도는 다 한다”고 했는데, 왜 나는 버티지 못하는 사람처럼 느껴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다시 시작했을 때, 나는 속도를 내기 전에 먼저 멈췄다. 늦게 시작했다는 사실보다, 다시 그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 훨씬 더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 두려움은 나를 겁쟁이로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현실적인 사람이 되게 했다. 나는 이제 의지보다 조건을 먼저 보게 되었고, 목표보다 상태를 먼저 점검하게 되었다.
‘지금 나는 얼마나 회복되어 있는가?’
‘이 일을 계속해도 나를 잃지 않을 수 있는가?’
‘속도를 늦추면 뒤처질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무너지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이 질문들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기보다는 이상할 정도로 차분하게 만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질문 자체를 회피했을 것이다. 약해 보일까 봐, 스스로에게 변명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까 봐. 하지만 한 번 무너져 본 이후의 나는 알게 되었다. 질문을 피하는 게 강함이 아니라, 질문을 무시한 채 달리는 게 가장 위험하다는 사실을.
나는 더 이상 ‘언제 도착하느냐’보다 ‘어떤 상태로 도착하느냐’를 생각하게 되었다. 아무리 빨리 가도, 도착했을 때 내가 텅 비어 있다면 그건 성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조금 늦어지더라도 내가 나 자신을 유지한 채 도착할 수 있다면, 그 과정은 실패가 아니라 선택이라고 느껴졌다.
그때부터 ‘늦음’의 의미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늦는다는 것은 뒤처진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리듬을 찾는 데 시간이 걸렸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같은 출발선에 서 있지 않다는 사실을,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이해하게 된 순간이었다.
나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속도를 기준으로 나를 평가하지 않았다. 대신 나 자신의 회복 속도, 집중이 유지되는 시간, 불안이 올라오는 빈도 같은 것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를 기준으로 삼기 시작하자, 늦게 시작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그것이 나를 몰아붙이는 채찍은 되지 못했다.
오히려 나는 그 늦음 덕분에,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기 시작했다. 빨리 가는 사람들은 보통 지나쳐 버리는 신호들,지침, 불안, 무기력, 자기혐오 같은 감정들을 나는 비교적 이른 시점에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신호들을 무시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그건 느린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감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조급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조급해질 이유를 잃어버렸다.
속도를 높여 얻을 수 있는 것보다, 속도를 낮춤으로써 지킬 수 있는 것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늦게 시작했지만 조급하지 않았던 유일한 이유는 단순했다.
나는 더 이상 ‘버티는 나’를 증명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무너지지 않는 나로 남고 싶었다.
그리고 그 선택이, 나의 기준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시간보다 안정이 먼저라는 이 단순한 기준은, 이후 내가 내리는 모든 결정의 출발점이 되었다.
불안이 사라진 게 아니라, 다루는 방식이 달라졌다
조급하지 않다고 해서 불안이 없었던 건 아니다. 이건 분명히 말하고 싶다.
나는 여전히 불안을 느꼈다. 아니, 오히려 예전보다 더 자주 불안을 인식했다. 다만 달라진 점이 하나 있었다. 불안을 밀어내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 불안을 행동의 연료로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전의 나는 불안을 위험 신호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가속 페달처럼 사용했다. 불안해질수록 더 빨리 움직였고, 더 많은 계획을 세웠고, 더 강하게 나 자신을 몰아붙였다. 불안은 나에게 “지금 더 해야 한다”, “멈추면 안 된다”는 명령처럼 작동했다. 그때는 그게 성실함이고 책임감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건 성실함이 아니라 공포에 기반한 반응이었다는 걸.
늦게 시작했다는 사실은 그 공포를 더 키웠다.
이미 뒤처졌다는 생각은 불안을 상수처럼 만들어 놓았다. 무언가를 하지 않고 있으면 죄책감이 올라왔고, 잠깐 쉬고 있어도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이러다 더 늦어지는 거 아니야?’라는 목소리가 반복되었다. 그 상태에서는 어떤 선택을 해도 불안이 사라지지 않았다. 더 해도 불안했고, 덜 해도 불안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방식을 바꿨다.
불안을 없애려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불안이 언제, 어떤 조건에서 커지는지 관찰하기로 했다. 이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는 보통 불안을 느끼면 곧바로 해결하려 들지, 들여다보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는 불안이 가장 커지는 순간들을 기록해보기 시작했다. 남들과 나를 비교한 직후, SNS를 오래 본 날, 명확하지 않은 목표를 억지로 밀어붙인 날, 컨디션이 좋지 않은데도 ‘이 정도는 해야지’라고 말한 날들. 공통점은 분명했다. 내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선택을 했을 때 불안은 항상 증폭되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뒤, 나는 불안을 기준으로 행동을 바꾸기 시작했다.
불안해지면 더 하는 게 아니라, 왜 불안해졌는지부터 묻는 사람이 되었다. 이 질문은 나를 느리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훨씬 안정적으로 만들었다.
“지금 이 불안은 게으름 때문일까, 아니면 과부하 때문일까?”
“이 불안은 실제 위험을 알려주는 걸까, 아니면 비교에서 온 허상일까?”
“이 불안을 무시하면 나는 버틸 수 있을까, 아니면 또 무너질까?”
이 질문들에 답하다 보면, 놀랍게도 많은 불안이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어떤 불안은 그냥 지나가도 되는 감정이었고, 어떤 불안은 휴식이 필요한 신호였으며, 또 어떤 불안은 목표를 재조정하라는 경고였다. 모두 같은 불안처럼 느껴졌지만, 성격은 전혀 달랐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중요한 걸 하나 배웠다.
불안을 통제하려는 사람은 결국 불안에 끌려다니게 되고, 불안을 이해하려는 사람은 선택권을 되찾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늦게 시작한 사람일수록 불안을 없애고 싶어 한다. 불안은 ‘시간이 없다는 증거’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불안을 없애려 할수록 시간은 더 왜곡된다. 계속 급해지고, 계속 부족하다고 느끼게 된다. 반면 불안을 다루는 방식이 바뀌면, 시간에 대한 감각도 함께 달라진다.
나는 더 이상 하루를 ‘얼마나 해냈는지’로 평가하지 않았다.
대신 ‘오늘 나의 상태는 어땠는지’, ‘이 리듬을 내일도 유지할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하루를 정리했다. 그 기준은 외부에서 보면 나태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안에서는 분명한 차이가 느껴졌다. 하루를 마칠 때 남는 감정이 죄책감이 아니라 안정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불안이 완전히 사라진 날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불안 때문에 나 자신을 의심하는 날은 점점 줄어들었다. 이 차이는 아주 크다. 불안은 감정이지만, 자기 의심은 정체성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불안해지면 ‘내가 부족해서 그렇다’고 결론 내렸다면, 이제는 ‘지금 환경이나 조건이 나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변화 덕분에 나는 선택을 미루지 않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조급함을 내려놓자 결정은 더 빨라졌다. 왜냐하면 더 이상 ‘완벽한 선택’을 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지금의 나에게 가장 무리가 적은 선택을 하게 되었다.
늦게 시작했지만 조급하지 않았던 이유는 여기에도 있었다.
나는 불안을 적으로 두지 않았고, 경쟁 상대로 삼지도 않았다.
그저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존재로 대했다.
그 결과,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지만
그 시간 위에서의 나는 이전보다 훨씬 덜 흔들리고 있었다.
늦음이 약점이 아니라 기준이 되었을 때
나는 오랫동안 ‘늦다’는 말을 사실처럼 받아들이며 살았다.
누가 직접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주변의 속도와 결과가 그 말을 대신해 주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같은 나이, 비슷한 출발선, 이미 도착해 있는 사람들. 그 사이에서 나는 늘 설명이 필요한 위치에 있었다. 왜 아직 여기인지, 왜 이 속도인지, 왜 이렇게 돌아왔는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해명해야 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늦음을 어떻게든 만회하려 했다.
조금 더 서두르고, 조금 더 무리하고, 조금 더 참고 견디면 언젠가는 비슷한 위치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가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제대로 보지 못했다. 체력은 점점 바닥을 드러냈고, 집중력은 짧아졌으며, 선택 하나하나에 깔리는 불안의 밀도는 점점 짙어졌다. 그때의 나는 ‘늦음’을 약점으로만 인식했고, 그 약점을 덮기 위해 나를 계속 소모시키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주 조용한 깨달음이 찾아왔다.
늦음을 없애려 할수록 나는 나 자신과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속도를 올릴수록 불안은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기준만 더 외부로 이동했다. 남들의 위치, 남들의 성과, 남들의 속도가 내 선택의 출발점이 되면서, 나는 점점 나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다.
‘만약 내가 이 속도로 끝까지 가지 못한다면, 그건 정말 실패일까?’
이 질문은 단순했지만, 그동안 한 번도 진지하게 마주한 적이 없던 질문이었다. 나는 늘 ‘당연히 실패’라고 가정한 채 달려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을 곱씹을수록, 그 가정이 얼마나 허약한 기반 위에 서 있었는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같은 트랙 위에 서 있지 않았다.
목적도, 방향도, 감당할 수 있는 리듬도 달랐다. 그런데도 왜 나는 계속 같은 기준으로 나를 재단하고 있었을까. 그 기준은 누가 만든 것이었고, 왜 나는 그 기준을 이렇게까지 신뢰하고 있었을까. 이 의문은 내 삶 전반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늦음은 어느 순간부터 결함이 아니라 조건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조건은 고칠 대상이 아니라, 고려해야 할 요소다. 그리고 조건을 인정하면 전략이 바뀐다. 나는 늦음을 없애려는 전략을 버리고, 늦음을 전제로 한 선택을 하기 시작했다. 무리하지 않는 일정, 회복이 가능한 속도, 나를 소진시키지 않는 목표. 이전의 나였다면 ‘비겁하다’고 여겼을 선택들이었다.
하지만 그 선택들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지속할 수 있는 상태를 경험했다.
하루를 마쳤을 때 완전히 탈진하지 않았고, 다음 날을 생각하며 막막해지지 않았다. 이 차이는 아주 컸다. 성취의 크기보다, 남는 감정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아무리 해도 부족하다는 감정만 남았다면, 이제는 비록 작더라도 ‘이만하면 괜찮다’는 감각이 남았다.
그 감각은 서서히 나를 바꾸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언제쯤 따라잡을까’를 묻지 않았다. 대신 ‘이 상태를 얼마나 오래 유지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질문이 바뀌자 삶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빨리 가는 선택보다, 오래 갈 수 있는 선택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 변화는 겉으로 보면 소극적으로 보일 수 있었지만, 내 안에서는 분명한 전진이었다.
늦음은 그렇게 나의 판단 기준이 되었다.
무언가를 선택할 때, 나는 이제 묻는다. 이 선택이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드는가, 아니면 덜 불안하게 만드는가. 이 질문은 단순하지만 강력하다. 늦게 가는 사람에게 불안은 가장 큰 리스크이기 때문이다. 불안이 커질수록 판단은 흐려지고, 흐려진 판단은 다시 후회를 낳는다. 나는 그 고리를 끊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더 많은 기회를 잡기보다, 덜 흔들리는 선택을 택했다.
모두가 좋다고 말하는 길이라도, 나에게 맞지 않으면 가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뒤처질까 봐 붙잡았을 기회들을, 이제는 조용히 흘려보냈다. 그 선택들은 당장은 눈에 띄는 결과를 주지 않았지만, 대신 안정이라는 아주 단단한 토대를 남겼다.
안정 위에서 나는 조금씩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이번에는 무너질 걱정을 하면서가 아니라,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였다. 속도는 여전히 느렸지만, 방향은 분명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가 더 이상 나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늦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이유로 나를 깎아내리지 않게 되었다.
이제 늦음은 나에게 약점이 아니다.
오히려 나를 보호하는 장치에 가깝다. 무리한 선택을 경계하게 만들고, 보여주기식 성과에서 나를 떼어놓으며, 나의 상태를 계속해서 점검하게 만드는 기준. 늦게 가는 덕분에 나는 내 삶을 훨씬 정직하게 대하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빠르지 않다.
아직도 남들보다 뒤에 있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 하지만 그 순간들 속에서도 예전처럼 나를 몰아붙이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생각한다. 지금의 이 속도가 나를 지키고 있다면, 이 속도는 충분히 의미 있다고.
늦게 시작했지만 조급하지 않았던 이유는 결국 하나였다.
나는 더 이상 시간과 싸우지 않기로 했고, 나를 유지하는 쪽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 선택은 겉으로 보면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지만, 나를 오래 데려갈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안다.
늦게 가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확신이 있다는 걸.
그 확신은 빠른 성과가 아니라, 무너지지 않고 계속 갈 수 있다는 감각에서 온다는 걸.
이 감각이 생긴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서두르지 않는다.
늦음은 여전히 나와 함께 있지만, 그것은 더 이상 나를 재촉하지 않는다.
지금의 나는 늦어서 불안한 사람이 아니라, 내 기준을 가진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