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이 너무 많아 아무것도 못 하게 된 실패
오늘은 조언을 들을수록 선택을 못 하게 되었던 시간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조언을 모을수록 선택 능력이 서서히 마비되던 시간
조언을 듣기 시작했을 때의 나는 선택을 못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결정이 빠르다는 말을 자주 들었고, 한 번 정한 방향은 쉽게 바꾸지 않는 편이었다. 문제는 그 확신이 깨진 이후였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부터, 나는 내 선택이 항상 옳다고 믿지 않게 되었다. 그때부터 조언은 ‘참고 자료’가 아니라 ‘안전장치’가 되었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 덜 틀리기 위해, 최대한 후회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처음엔 조언 하나하나가 나를 도와주는 것 같았다. 내가 놓치고 있던 관점을 보게 해주었고, 감정에 치우친 판단을 조금은 객관화해 주는 느낌도 있었다. 하지만 조언을 들을수록 이상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선택을 앞두고 내 생각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이 조언의 문장들이었다. ‘이 상황에서는 이렇게 하라고 했지’, ‘저 사람은 이런 경우엔 버텨야 한다고 했어’, ‘다른 사람은 아예 방향을 틀었지’. 선택의 순간이 오면, 머릿속에서는 내 목소리가 아니라 타인의 말들이 먼저 줄을 섰다.
이때부터 판단의 구조가 바뀌었다. 예전에는 “나는 이게 맞다고 느끼는가”를 먼저 물었다면, 이제는 “이 선택을 했을 때 틀렸다고 말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를 먼저 계산했다. 조언은 선택을 도와주는 도구가 아니라, 선택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버렸다. 그 기준은 하나가 아니었다. 사람마다, 상황마다, 결과마다 모두 다른 기준을 들이밀었다.
조언이 늘어날수록 선택은 점점 무거워졌다. 하나를 고른다는 건, 다른 모든 조언을 동시에 거절하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선택이 맞다는 건, 저 선택이 틀렸다는 뜻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선택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는 행위’가 아니라, 누군가의 말을 틀렸다고 증명하는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 감각은 생각보다 빠르게 나를 위축시켰다.
나는 점점 결정을 미뤘다. 아직 정보가 충분하지 않다는 말로 스스로를 설득했고, 더 들어보면 분명 정리가 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조언은 정리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 충돌했다. 어떤 조언은 지금 당장 움직이라고 말했고, 어떤 조언은 절대 서두르지 말라고 했다. 어떤 조언은 지금의 고통은 당연하다고 했고, 어떤 조언은 이건 이미 신호라고 말했다. 어느 쪽도 틀린 말처럼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더 혼란스러워졌다.
이 시점에서 가장 큰 문제는 선택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선택을 할 수 있는 감각 자체가 무뎌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무엇이 나에게 중요했는지,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었는지, 어떤 리스크를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에 대한 감각이 점점 사라졌다. 대신 ‘사람들이 말하는 평균적인 답’만이 남았다. 하지만 평균적인 답은 언제나 안전해 보일 뿐, 실제로 나를 대신해 책임져주지는 않았다.
조언을 들을수록 나는 점점 더 신중해졌지만, 동시에 더 무력해졌다. 신중함은 판단을 정교하게 만들지 못했고, 오히려 판단 자체를 지연시키는 역할을 했다.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는 실패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채 흘려보낸 시간은 분명히 하나의 결과를 만들고 있었다.
가장 아이러니했던 건, 이 시기의 내가 가장 ‘열심히 고민하는 사람’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나는 충분히 생각하고 있었고, 충분히 참고 자료를 모으고 있었고, 충분히 신중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이 끝난 뒤에도 나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조언은 많아졌지만, 방향은 정해지지 않았다.
그때는 몰랐다. 조언을 듣는 행위가 나를 더 똑똑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결정을 대신 미뤄주는 장치가 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선택의 책임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다는 점에서, 조언은 달콤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나는 스스로 선택하는 연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
선택을 못 하게 된 시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답이 너무 많아서. 그리고 그 모든 답이 나보다 앞서 있는 사람들의 말이었기 때문에, 나는 점점 더 내 목소리를 의심하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실패는 아직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이미 충분히 진행되고 있었다.
답이 너무 많아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게 되었던 실패의 구조
조언이 많아진다는 건, 겉보기에는 선택지가 넓어지는 일처럼 보인다. 더 많은 길을 알게 되고, 더 다양한 가능성을 검토할 수 있으니 합리적인 선택에 가까워질 것 같았다. 하지만 실제로 내가 경험한 것은 그 반대였다. 선택지는 넓어졌지만, 선택 능력은 점점 마비되어 갔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조차 판단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선택을 ‘결정’으로 느끼지 않게 되었다. 선택은 곧 판결처럼 느껴졌다. 이 방향을 택하면 다른 모든 방향을 틀렸다고 선언하는 것 같았고, 나중에 결과가 나쁘면 “그때 왜 그 말을 안 들었냐”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게 분명했다. 그래서 선택은 점점 무거워졌고, 가볍게 시도해보는 일조차 어려워졌다.
조언이 많아질수록 머릿속에는 하나의 질문만 남았다.
“이 중에서 가장 틀릴 확률이 낮은 건 뭐지?”
이 질문은 얼핏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행동을 멈추게 만든다. 왜냐하면 틀릴 확률이 가장 낮은 선택은 대부분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선택을 하지 않으면 실패도 없다. 적어도 당장은 그렇다. 그래서 나는 선택 대신 검토를 택했다. 실행 대신 비교를, 결정 대신 보류를 반복했다.
문제는 이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서, 선택을 둘러싼 감각 자체가 변해버렸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선택이란 ‘불완전하지만 일단 가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선택은 ‘완벽해야만 가능한 것’이 되었다. 모든 변수를 고려하지 않으면 시작해서는 안 될 것 같았고, 한 가지라도 불확실한 요소가 남아 있으면 아직 준비가 덜 된 것처럼 느껴졌다.
이 과정에서 조언은 점점 더 많이 필요해졌다. 하나의 조언으로는 불안이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조언이 맞다는 확신을 얻기 위해 또 다른 조언이 필요했고, 그 조언을 검증하기 위해 다시 다른 사례를 찾아야 했다. 조언은 불안을 줄여주지 않았다. 오히려 불안을 정당화하는 재료가 되어갔다.
나는 점점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고민했는데, 아직 선택을 못 하는 건 어쩔 수 없어.”
하지만 그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라, 결정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있었던 것에 가까웠다.
이 시기의 실패는 눈에 띄는 형태로 나타나지 않았다. 크게 망한 일도 없었고, 명확하게 잘못된 선택을 한 것도 아니었다. 대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이 흘렀고, 상황은 조금씩 변했지만, 나는 그 변화에 개입하지 않았다. 선택을 미루는 동안, 기회는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다.
가장 괴로웠던 건, 이 상태가 겉으로는 ‘신중함’으로 보였다는 점이다. 주변에서는 “그래도 잘 생각하고 있네”, “조급하지 않아서 좋아 보인다”라는 말을 했다. 그 말들은 나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멈춰 있는 나를 정당화해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내 안에서는 정체되고 있다는 감각이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조언이 많아질수록 선택은 개인의 일이 아니게 되었다. 나는 더 이상 ‘내가 감당할 수 있는가’를 묻지 않았다. 대신 ‘이 선택이 객관적으로 옳은가’를 묻고 있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옳은 선택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 답이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더 찾아보면, 더 들어보면, 언젠가는 명확한 신호가 나타날 거라고.
그 신호는 오지 않았다. 대신 남은 건 피로였다. 끊임없이 비교하고 검토하느라 지친 상태, 어떤 선택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상태, 그리고 점점 작아지는 자기 신뢰였다. 실패는 바로 이 지점에서 완성되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나는 이미 많은 것을 잃고 있었다.
이 실패는 특히 자각하기 어려웠다.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택하지 못한 시간은 분명히 나를 이전보다 더 좁은 자리로 밀어넣고 있었다. 선택할 수 있는 체력도, 선택을 감당할 자신감도 함께 줄어들고 있었다.
이때까지도 나는 몰랐다. 진짜 실패는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 선택을 할 수 없게 된 상태 그 자체라는 사실을.
선택하지 않음이 결국 가장 큰 선택이 되어버렸다는 걸 깨달았을 때
선택을 미루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렀다. 나는 멈춰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가만히 서 있는 상태로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선택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결과였다. 다만 그 결과는 너무 조용해서, 실패라는 이름으로 부르기까지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처음 이 사실을 인식했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감정은 후회가 아니라 공허함이었다. ‘그때 왜 이 선택을 안 했을까’라는 생각보다, ‘나는 왜 아무 선택도 하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이 먼저 떠올랐다. 분명히 고민은 많이 했고, 생각도 충분히 했는데, 돌아보니 남아 있는 게 없었다. 선택의 흔적도, 실패의 경험도, 성공의 기억도 없이 시간만 지나가 있었다.
이 지점에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실패를 피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실패할 기회 자체를 회피하고 있었다는 것을. 실패하지 않기 위해 선택을 미뤘지만, 그 대가로 아무것도 쌓이지 않았다. 선택하지 않음은 안전한 중립 상태가 아니라, 서서히 가능성을 소진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선택을 못 하게 만든 조언들은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좀 더 지켜봐라”, “지금 결정하면 후회한다”, “준비가 덜 됐다.” 그 말들은 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말들이 언제까지 유효한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언에는 항상 ‘지금 말고 나중에’가 붙어 있었지만, 그 ‘나중에’가 언제인지에 대한 기준은 없었다.
결국 나중이라는 시간은 스스로 정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 기준을 세우지 않았다. 대신 계속해서 외부의 판단을 기다렸다. 누군가 “이제 해도 된다”고 말해주길, 이 선택이 안전하다고 보증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런 보증은 오지 않았다. 선택의 책임은 언제나 선택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선택이란, 완벽한 정보를 갖춘 상태에서 하는 게 아니라, 불완전한 상태에서도 책임을 감수하겠다고 결정하는 행위라는 점을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동안 선택을 미뤄왔지만, 사실은 책임을 미루고 있었던 셈이었다.
이 실패 이후, 나는 선택의 기준을 다시 세우기 시작했다. 더 이상 ‘가장 옳은 선택’을 찾지 않기로 했다. 대신 ‘지금의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택’을 찾기로 했다. 이 기준은 이전보다 훨씬 불완전해 보였지만, 적어도 나를 멈추게 하지는 않았다. 선택의 무게를 줄이자, 선택이 다시 가능해졌다.
조언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모든 조언을 실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어떤 조언은 지금의 나에게는 너무 앞선 이야기일 수 있고, 어떤 조언은 아예 나의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말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조언은 여전히 참고할 수 있었지만, 더 이상 나를 대신해 결정하지는 않았다.
이제 선택은 여전히 어렵다. 불안도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선택을 회피하지는 않는다. 틀릴 수 있다는 걸 알고도, 부족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단 한 방향을 정한다. 그리고 필요하면 수정한다. 이 방식이 더 느릴 수도 있고, 덜 멋져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선택만큼은 내 것이다.
답이 너무 많아 아무것도 못 하게 되었던 시간은 분명한 실패였다. 하지만 그 실패 덕분에 나는 한 가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선택이란, 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나를 다시 선택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선택은, 결국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대신해주지 않는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