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이정도는 다 견뎌 라는 말에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었던 실페에 대해 이야기 하러 해.

고통을 말하는 순간, 나는 이미 약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처음 “힘들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기까지, 나는 이미 꽤 많은 과정을 거쳤다. 그 말은 즉흥적으로 튀어나온 불평이 아니었다. 며칠, 몇 주 동안 누적된 피로와 불안, 집중력의 붕괴와 감정의 마모를 스스로 점검한 끝에 겨우 도달한 문장이었다. 이 정도면 혼자 감당하는 선을 넘은 것 같다는 판단. 아직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위험 신호라는 감각. 나는 그 말을 꺼내며, 최소한 “지금 상태를 한 번은 살펴봐야 한다”는 반응을 기대했다.
하지만 “이 정도는 다 견뎌”라는 말은 그 모든 과정을 한 문장으로 지워버렸다. 내가 어떤 과정을 거쳐 그 말에 도달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오직 결과였다. 아직 쓰러지지 않았다는 사실, 아직 완전히 망가지지 않았다는 점. 그 말은 현재의 상태가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잔여 기능만을 기준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기준은 나에게 너무 가혹했다.
그 순간부터 나는 고통을 설명할 언어를 잃었다. 왜냐하면 설명하려는 순간마다, 그 말이 미리 도착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정도는 누구나 겪어.” “그건 힘든 축에도 안 들어.” “그걸로 힘들면 앞으로는 어떻게 하려고 그래.” 이 문장들은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하나의 메시지를 공유하고 있었다. 지금 느끼는 고통은 인정될 만큼 충분하지 않다는 메시지였다.
이때부터 내 안에서는 미묘한 분열이 시작됐다. 분명히 힘들다고 느끼는 나와, 그 힘듦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내가 동시에 존재했다. 나는 점점 감각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대신 외부의 기준을 내부로 들여오기 시작했다. 남들이 괜찮다고 말하는 상태라면, 나도 괜찮아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문제는 고통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힘들다는 감정이 올라오면, 그 감정을 분석하기 전에 먼저 눌렀다. ‘아직은 아니야’, ‘이 정도로 흔들리면 안 돼’, ‘지금 멈추면 뒤처져’. 이런 문장들이 자동으로 떠올랐다. 그 문장들은 나를 다잡는 말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나를 침묵시키는 장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고통을 느끼는 방식 자체가 바뀌었다. 예전에는 힘들면 이유를 찾고, 환경을 조정하려 했지만, 이제는 힘들면 나 자신을 점검했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내가 왜 이렇게 약해졌는지, 어디서 멘탈 관리에 실패했는지. 고통은 외부 조건의 결과가 아니라, 내부 결함의 증거가 되어갔다.
이 변화는 아주 위험했다. 왜냐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향이 완전히 틀어졌기 때문이다. 환경을 조정해야 할 순간에도 나는 나를 다그쳤고, 속도를 늦춰야 할 시점에도 나는 더 밀어붙였다. 쉬어야 할 이유를 찾기보다, 쉬지 말아야 할 이유를 더 많이 만들어냈다. 그 과정에서 몸은 점점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집중이 갑자기 끊기고, 작은 자극에도 쉽게 예민해지고, 아무 이유 없이 피로가 몰려왔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신호를 ‘나의 부족함’으로 해석했다. “요즘 내가 의지가 약해졌어.” “내가 예전 같지 않네.” 그 생각들은 나를 반성하게 만들었지만, 결코 회복시키지는 않았다. 오히려 고통 위에 죄책감을 덧붙였다.
가장 무서웠던 건, 이 상태가 꽤 오래 정상처럼 유지되었다는 사실이다. 겉으로 보기에 나는 여전히 책임감 있었고, 맡은 일을 해내고 있었으며,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누구도 나의 상태를 심각하게 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시선은 다시 내 안으로 들어와 나를 설득했다. 봐, 아직 괜찮잖아. 이 정도는 다 견딜 수 있잖아.
이렇게 “이 정도는 다 견뎌”라는 말은 점점 외부의 조언이 아니라, 내면화된 규칙이 되었다. 누군가가 말해주지 않아도, 내가 먼저 나에게 그 말을 했다. 고통을 느끼는 순간마다 자동으로 작동하는 판단 기준. 그 기준은 나를 보호하지 않았다. 다만 나를 계속 같은 자리, 같은 방식으로 묶어두었을 뿐이다.
결국 나는 아주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실패한 이유는 고통을 견디지 못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너무 오래 과소평가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를 감당 가능한 척하며 버틴 시간들이, 나를 더 깊은 실패로 데려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실패는 한순간에 무너지는 형태가 아니라, 서서히 판단력을 잃어가는 형태로 찾아왔다.
이제야 나는 안다. 고통을 말하는 순간 약해지는 게 아니라, 고통을 말하지 못하게 만드는 말들이 사람을 약하게 만든다는 것을. 그리고 “이 정도는 다 견뎌”라는 문장은, 그중에서도 가장 교묘하고 가장 쉽게 사람을 설득하는 말이었다는 것을.
내 고통을 과소평가하게 만든 조언
판단 기준이 바깥으로 밀려난 과정
“이 정도는 다 견뎌”라는 말이 반복되면서, 내 안에서는 아주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고통의 크기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고통을 판단하는 기준 자체가 바뀌기 시작한 것이었다. 예전에는 힘들면 그 이유를 살폈다. 무엇이 과한지, 어떤 부분이 지속 불가능한지, 지금의 속도가 나에게 맞는지. 판단의 중심은 언제나 ‘나’였다. 하지만 그 조언을 계속 듣고, 또 스스로에게 반복하면서부터 판단의 중심은 점점 바깥으로 이동했다.
나는 더 이상 “내가 힘든가?”를 묻지 않았다. 대신 “이 정도로 힘들어해도 되는가?”를 묻기 시작했다. 질문의 주어가 바뀐 순간,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대개는 아직은 아니다였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이 많았고, 나보다 더 열악한 조건에서도 버티는 사례가 넘쳐났기 때문이다. 그 비교 속에서 나의 고통은 언제나 상대적으로 작아 보였다.
문제는 이 비교가 끝이 없다는 데 있었다. 누군가는 항상 더 힘들었고, 누군가는 항상 더 오래 버텼다. 그래서 나는 결코 ‘충분히 힘든 상태’에 도달할 수 없었다. 고통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멈춰야 한다는 기준은 사라지고, 대신 탈락 기준만 남았다.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으면 계속 가야 했고, 아직 기능하고 있으면 멈출 이유가 없었다.
이때부터 조언은 도움의 언어가 아니라 통제의 언어로 작동했다. 그 조언은 나의 상태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선택지를 넓혀주지도 않았다. 오히려 선택을 단순화했다. 견디거나, 아니면 약해지거나. 계속 가거나, 아니면 포기하거나. 그 이분법 속에서 나는 언제나 ‘견디는 쪽’을 택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실패의 책임이 나에게 돌아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점점 스스로를 설득하는 데 능숙해졌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는 법, 마음의 경고를 합리화하는 법, 지금 멈추면 더 큰 손해라는 논리를 만들어내는 법. 이 모든 것이 조언의 언어를 빌려 완성됐다. “조금만 더 하면 나아질 거야.” “지금 그만두면 지금까지 버틴 게 아까워.” “다들 이 정도는 견뎌.”
이 설득은 아주 교묘했다. 왜냐하면 겉으로 보기에는 합리적이었기 때문이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 나는 감정을 통제한 게 아니라 차단하고 있었다. 현실을 직시한 게 아니라, 현실의 일부만 선택적으로 보고 있었다. 책임감 있게 행동한 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책임만 유예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왜곡된 판단은 선택의 연쇄를 만들어냈다. 쉬어야 할 때 쉬지 못했고, 방향을 바꿔야 할 때 그대로 밀고 나갔다. 그 선택들은 하나하나 보면 아주 작은 결정처럼 보였지만, 누적되면서 돌이키기 어려운 상태를 만들었다. 이미 많이 지쳐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선택을 감당할 여력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 같은 선택을 반복했다. 이미 익숙한 방식, 이미 검증(?)된 견딤의 방식으로.
가장 아팠던 건, 이 모든 과정에서 나의 실패조차 제대로 해석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결과가 좋지 않았을 때도 나는 상황을 돌아보지 않았다. 왜 이 선택이 나에게 맞지 않았는지, 어떤 신호를 놓쳤는지 분석하지 않았다. 대신 또다시 나 자신을 탓했다. “내가 충분히 버티지 못해서 그래.” “조금만 더 강했으면 결과가 달라졌을 거야.” 실패는 잘못된 판단의 결과가 아니라, 견딤의 부족으로 재해석됐다.
이렇게 되면 배울 수 있는 게 사라진다. 실패는 교정의 기회가 아니라, 자책의 근거가 된다. 그리고 자책은 다시 더 무리한 견딤으로 이어진다. 이 악순환 속에서 나는 점점 판단력을 잃어갔다. 무엇이 나에게 맞는지, 어디까지가 한계인지, 어떤 선택이 회복으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나는 아주 늦게서야 깨달았다. 내 고통을 과소평가하게 만든 것은 상황 그 자체가 아니라, 상황을 해석하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해석 방식의 중심에는 늘 “이 정도는 다 견뎌”라는 조언이 있었다. 그 말은 나를 강하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나의 판단 기준을 빼앗아 갔다.
이제 와서야 분명해졌다. 조언은 중립적이지 않다. 특히 고통에 관한 조언은, 듣는 사람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치명적인 결과를 만든다. 나의 고통을 내가 판단하지 못하게 만드는 조언은, 결국 나의 선택권을 박탈하는 조언이었다.
견딘 끝에 남은 실패, 그리고 뒤늦게 배운 고통의 기준
결국 나는 실패했다.
그 실패는 극적인 붕괴의 형태로 오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게 무너진 것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이 단번에 알아볼 만큼 드러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조용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찾아왔다. 결과가 나오지 않기 시작했고, 같은 노력을 반복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더 애쓰고 있었는데, 점점 더 멀어지는 느낌만 남았다.
그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예상대로였다. 역시 내가 부족했던 거야.
나는 실패의 원인을 다시 나 자신에게 돌렸다. 지금까지 견뎌온 시간이 부족했던 것 같고, 더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한 게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실패 앞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실패를 만회하겠다는 명목으로, 같은 방식을 더 강화했다. 쉬지 않았고, 속도를 늦추지 않았고,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실패는 나에게 교정 신호가 아니라, 더 견뎌야 할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그 선택은 나를 회복으로 데려가지 않았다. 실패 이후의 나는 이전보다 더 흐릿해졌다. 판단은 더 늦어졌고, 결정은 더 보수적으로 변했다. 무엇을 선택해도 확신이 들지 않았고, 어떤 결과가 나와도 스스로를 칭찬하지 못했다. 이미 안에서는 많이 닳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나는 처음으로 이상함을 느꼈다. 왜 이렇게까지 버텼는데, 남은 게 없을까.
그 질문은 아주 늦게 찾아왔지만, 그만큼 무거웠다. 나는 실패 자체보다, 실패 이후에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더 두려웠다. 좌절도, 분노도, 억울함도 희미했다. 대신 공허함만 남았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이 실패가 단순한 결과 문제가 아니라는 걸 감지했다. 뭔가 훨씬 이전부터 잘못 쌓여왔다는 느낌이었다.
천천히 과정을 되짚기 시작했을 때, 나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마주했다. 이 실패는 능력의 한계가 아니라, 고통의 기준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나온 결과라는 점이었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고통을 과소평가해왔고, 그 대가로 판단력을 잃었다. 언제 멈춰야 하는지, 언제 방향을 바꿔야 하는지, 언제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지에 대한 감각이 완전히 무뎌져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이 정도는 다 견뎌”라는 말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냈는지 분명해졌다. 그 말은 나를 단련시키지 않았다. 대신 나에게서 조정의 권한을 빼앗아갔다. 견디는 능력만 남기고, 선택하는 능력을 제거했다. 그래서 나는 계속 움직였지만, 제대로 선택하지는 못했다. 그 결과가 바로 이 실패였다.
이 실패를 통해 나는 처음으로 고통을 다시 정의해야 했다. 고통은 참아야 할 적이 아니라, 조정이 필요하다는 신호라는 사실. 고통의 크기는 남과 비교해서 판단할 수 없고, 결과로 증명해야 할 대상도 아니라는 사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고통을 느끼는 내가 그 고통의 1차 판단자라는 사실이었다.
회복은 그 깨달음 이후에야 시작됐다. 놀랍게도 회복의 첫 단계는 무언가를 더 하는 게 아니었다. 덜 견디는 것이었다. 더 이상 자동으로 “아직은 괜찮아”라고 말하지 않는 것, 힘들다는 감각이 올라올 때 즉시 반박하지 않는 것, 그 감각을 잠시 그대로 두고 바라보는 것. 그 작은 변화가 다시 판단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제야 이해한다. 어떤 실패는 노력 부족의 결과가 아니라, 너무 오래 잘못 견딘 결과라는 것을. 그리고 그 실패는 다시 시작하라는 신호가 아니라, 기준을 바꾸라는 신호였다는 것을. 나에게 필요한 건 더 강한 의지가 아니라, 더 정확한 감각이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여전히 완벽하게 회복된 상태는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하나 있다. 이제 나는 고통을 느끼는 순간, 나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 지금 이 고통이 무엇을 조정하라고 말하고 있는지. 그 질문을 다시 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이 실패는 단순한 좌절로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안다.
“이 정도는 다 견뎌”라는 말보다 더 위험한 건,
그 말을 너무 오래 믿어버린 나 자신이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