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락 없는 모방의 끝 오늘은 성공담을 따라 하다 나만 뒤처졌던 경험에 대해 이야기 하러 해.

성공담을 그대로 베끼는 것이 가장 안전한 선택처럼 느껴졌던 시기
처음에는 그게 모방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믿었다. 이미 누군가는 그 길을 걸어갔고, 이미 결과를 만들어냈고, 이미 “이렇게 하면 된다”는 이야기를 세상에 남겨두었다. 그 이야기를 따라가는 게 왜 문제일까. 실패의 위험을 줄이고 싶었던 나에게, 성공담은 가장 안전한 지도처럼 보였다. 나는 길을 새로 만들 용기가 없었고, 검증되지 않은 선택을 감당할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이미 성공했다고 불리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갔다.
성공담에는 묘한 설득력이 있다. 그것은 단순한 조언이 아니라 완성된 서사이기 때문이다. 시작은 고단했고, 중간은 고통스러웠으며, 끝에는 보상이 있었다는 구조. 이 서사는 듣는 사람에게 “나도 저 과정을 통과하면 같은 결말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심어준다. 특히 내가 불안정한 상태일수록, 이 서사는 더 강하게 작동했다. 불확실한 현실보다, 이미 끝이 정해진 이야기 쪽이 훨씬 편안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성공담이 늘 결과 중심으로 정리된 이야기라는 점이다. 그 안에는 수많은 선택지가 삭제되어 있고, 실패 가능성은 대부분 생략되어 있다. 성공에 기여하지 않은 요소들은 자연스럽게 빠져나가고, 남은 것만 마치 필수 조건처럼 정리된다. 나는 그 구조를 인식하지 못한 채, 그저 “저 사람이 했던 것”을 하나의 공식처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공식을 내 삶에 그대로 대입하기 시작했다.
그때의 나는 맥락이라는 단어를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출발선, 환경, 자원, 관계, 시간적 여유 같은 것들은 성공담 속에서 부차적인 요소처럼 보였다. 성공한 사람은 “나도 처음엔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했고,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하지만 나중에야 알게 됐다. 그 “아무것도 없었다”는 말 속에는, 이미 형성된 네트워크나 실패해도 무너지지 않을 안전망, 혹은 감당 가능한 리스크가 숨어 있었다는 걸.
나는 성공담을 따라 하면서 나 자신을 점점 삭제했다. 원래의 내 속도, 내 리듬, 내 한계를 고려하는 대신, 성공담 속 인물의 시간표를 기준으로 삼았다. “이 시기에는 이 정도는 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는 포기하면 안 된다” 같은 기준들이 내 삶 위에 덧씌워졌다. 그 기준을 충족하지 못할 때마다, 나는 상황을 조정하는 대신 스스로를 질책했다. 아직 준비가 안 됐다는 생각보다는, 내가 부족하다는 결론이 먼저 나왔다.
이 과정에서 가장 위험했던 건, 비교가 점점 자동화되었다는 점이다. 성공담을 읽을 때마다 나는 내 현재 위치를 그 이야기의 중간 지점 어딘가에 억지로 끼워 맞췄다. “나는 지금 저 사람이 이 정도 되었을 때랑 비슷한 단계일까?”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하지만 그 비교는 언제나 불리하게 작동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 사람의 실패 구간은 알 수 없었고,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은 선택들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성공담을 따라 하면서도 점점 뒤처지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열심히 할수록, 방향을 더 명확히 할수록, 내 삶은 가벼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무거워졌다. 해야 할 일은 늘어나는데, 회복할 여유는 사라졌다. 성공담은 나를 앞으로 끌어당기는 대신, 현재의 나를 계속 부정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쉽게 멈추지 못했다.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그 성공담을 기준으로 설계해왔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멈추면, 지금까지의 선택들이 전부 잘못된 것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계속 따라갔다. 뒤처지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면서도, 그 감각을 “성장통”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이름 붙이기는 아주 효과적이었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않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분명히 깨달았다.
이건 단순히 힘든 게 아니라, 방향 자체가 어긋나고 있다는 신호라는 걸.
성공담을 그대로 따라가는 동안, 나는 한 번도 “이 방식이 나에게 맞는가”를 제대로 묻지 않았다. 대신 “이걸 따라 하지 않으면 내가 뒤처지는 건 아닐까”만 고민했다. 그 질문의 방향이 나를 점점 더 깊은 피로로 몰아넣었다. 결국 나는 성공담을 따라 하다가 성공에 가까워진 게 아니라, 나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이 소제목에서 말하고 싶은 건 하나다.
성공담을 그대로 따르는 선택은 안전해 보이지만, 그 안전함은 착시일 수 있다. 특히 그 성공담이 만들어진 맥락을 고려하지 않을 때, 그 모방은 성장 대신 소진을 남긴다. 그리고 그 소진은 “뒤처지고 있다”는 감각으로 가장 먼저 드러난다.
맥락을 지운 모방이 어떻게 나를 더 뒤처지게 만들었는가
성공담을 따라 하며 가장 크게 착각했던 건, 행동만 복사하면 결과도 따라온다는 믿음이었다. 나는 성공한 사람들이 했다는 행동 목록을 하나의 체크리스트처럼 받아들였다. 새벽 기상, 일정 관리, 자기계발 루틴, 인간관계 정리, 집중 시간 확보 같은 것들이 나열되어 있었고, 나는 그 항목들을 내 삶에 그대로 이식하려 했다. 문제는 그 행동들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어떤 조건 위에서 가능했는지를 전혀 따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맥락 없는 모방은 처음에는 의욕을 만든다. “나도 이제 제대로 해보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의욕은 오래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행동들이 내 삶의 구조와 충돌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었고, 체력도 심리적 여유도 제한적이었다. 그런데 성공담 속 루틴은 그런 제약을 고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약이 없는 상태를 기본값으로 전제한다. 그 전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현실을 조정하는 대신 나 자신을 억지로 끼워 맞추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무너진 건 에너지의 배분이었다. 성공담 속 사람들은 한 가지 목표에 대부분의 자원을 집중할 수 있었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여러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했고, 실패했을 때 감당해야 할 손실도 훨씬 컸다. 그럼에도 나는 같은 강도의 몰입을 요구했다. 그 결과, 집중은 깊어지지 않았고 피로만 누적됐다. 하루를 끝낼수록 “열심히 살았다”는 만족감보다 “아직도 부족하다”는 감각이 더 커졌다.
맥락 없는 모방은 시간 감각도 왜곡한다. 성공담에는 종종 “3년을 이렇게 버텼다”, “몇 년간 수입 없이 견뎠다”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나는 그 시간을 하나의 기준처럼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 사람이 감당할 수 있었던 시간이지, 내가 견뎌야 할 의무가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그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 채, 나는 내 삶을 계속 지연시켰다. 지금의 고통은 미래의 보상을 위한 투자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문제는 그 미래가 점점 추상적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구체적인 목표가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목표는 흐려지고 “지금 포기하면 안 된다”는 명제만 남았다. 성공담을 따라 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성공 자체보다 탈락하지 않는 것이 목적이 된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보다, 이 레이스에서 밀려나지 않았는지에만 집착했다. 그 상태에서는 방향 수정이 거의 불가능해진다.
맥락을 지운 모방이 특히 위험한 이유는, 실패를 전부 개인의 역량 문제로 돌리게 만든다는 점이다. “나는 왜 저 사람처럼 못 하지?”라는 질문은 자연스럽게 “내가 부족해서”라는 답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 질문에는 이미 함정이 깔려 있다. 비교 대상의 조건이 제거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비교이기 때문이다. 출발선이 다르고, 환경이 다른데도 결과만 놓고 비교하면, 결론은 언제나 자기비난으로 수렴한다.
이 과정에서 나는 점점 내 선택을 의심하지 않게 됐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모방은 생각을 멈추게 한다. 이미 누군가 검증한 길이라고 믿기 때문에, 의심은 불필요한 잡음처럼 느껴진다. 대신 나는 “왜 더 잘 못하나”만 고민했다. 그 결과, 방향이 틀렸다는 신호가 와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실패는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해야 할 장애물로만 인식됐다.
맥락 없는 모방은 결국 자기 이해를 방해한다. 나는 내가 어떤 환경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사람인지, 어떤 리듬에서 지속 가능한지를 점점 잊어갔다. 성공담 속 기준이 내 기준을 대체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나는 나를 관찰하는 대신, 나를 평가하기 시작했다. 평가의 기준은 언제나 외부에 있었고, 그 기준을 충족하지 못할 때마다 자존감은 조금씩 깎여 나갔다.
뒤처지고 있다는 감각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객관적으로 보면 멈춘 적도 없고, 시도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계속 탈락자처럼 느껴졌다. 성공담 속 사람들은 점점 멀어져 가는 것 같았고, 나는 같은 자리에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사실 나는 뒤처진 게 아니라, 애초에 다른 트랙에서 뛰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가능성을 생각하기까지, 나는 너무 오랜 시간 같은 기준만 붙들고 있었다.
결국 나는 깨닫게 됐다.
맥락 없는 모방은 실패를 줄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실패를 설명할 언어를 빼앗는다. 왜 힘든지, 왜 안 되는지 말할 수 없게 만들고, 대신 “내가 못나서”라는 단순한 문장만 남긴다. 그 문장은 빠르지만, 너무 잔인하다. 그리고 그 문장을 반복할수록, 사람은 점점 자기 자신을 포기하게 된다.
이 소제목의 결론은 분명하다.
성공담을 따라 하다 뒤처졌다면, 그건 네가 느려서가 아니라 그 성공담이 만들어진 맥락이 너에게 없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한, 모방은 계속해서 너를 소진시킨다.
나만의 맥락을 회복했을 때 비로소 멈출 수 있었던 경쟁
성공담을 따라 하다 멈추게 된 순간은, 극적인 깨달음이나 큰 사건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사소한 감각에서 시작됐다. 더 이상 “잘하고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계획을 세우고, 루틴을 지키고, 남들이 말하는 정석을 반복해도, 삶이 앞으로 나아간다는 감각이 오지 않았다. 그저 매일을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이상하게도 포기하고 싶다는 말조차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미 너무 오래 남의 기준으로 달려왔기 때문이다. 멈춘다는 선택 자체가, 규칙 위반처럼 느껴졌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질문의 방향을 바꿨다.
“어떻게 하면 저 사람처럼 될 수 있을까?”가 아니라
“나는 지금 왜 이렇게까지 힘든 걸까?”라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은 놀라울 만큼 많은 것을 드러냈다. 그동안 나는 내 삶을 설명하는 언어를 거의 쓰지 않고 있었다. 대신 성공담 속 문장들을 빌려와 나를 설명했다. “지금은 버틸 때다”, “이 시기는 원래 힘들다”, “이 정도 고통은 감수해야 한다” 같은 말들로 내 상태를 덮어두었다. 하지만 그 문장들을 걷어내고 나니,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뒤처지고 있는 게 아니라, 애초에 나에게 맞지 않는 경기에 참가해 있었던 것이었다.
맥락을 회복한다는 건, 거창한 전략을 세우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기본적인 질문들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에너지는 어느 정도인지, 이 선택이 실패했을 때 내가 감당해야 할 손실은 무엇인지, 회복에 필요한 시간은 얼마나 되는지. 성공담 속에서는 한 번도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던 질문들이었다. 하지만 내 삶에서는 그 질문들이 전부였다. 이 질문들을 무시한 채 달려온 시간이, 나를 이렇게 지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맥락을 회복하면서 가장 먼저 달라진 건 비교의 대상이었다. 더 이상 성공한 사람의 과거를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 대신 어제의 나, 한 달 전의 나, 그리고 무리하지 않았을 때의 나를 기준으로 삼았다. 이 변화는 생각보다 컸다. 이전에는 언제나 부족함만 보였다면, 이제는 아주 미세한 변화들도 감지할 수 있었다. 덜 지쳤는지, 덜 불안한지, 하루를 끝냈을 때 남는 감정이 무엇인지. 성공담을 따라갈 때는 무시했던 신호들이, 다시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경쟁에서 스스로를 빼는 선택을 했다. 남들이 어디까지 왔는지, 얼마나 빠른지, 어떤 성과를 냈는지를 계속 확인하는 습관을 의식적으로 줄였다. 이건 현실을 외면하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 판단력을 회복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비교는 방향을 알려주지 않는다. 비교는 오직 위치만 알려준다. 그런데 방향이 잘못된 상태에서 위치만 확인하면, 사람은 더 빨리 잘못된 곳으로 달리게 된다.
맥락을 되찾자, 실패의 의미도 달라졌다. 실패는 더 이상 “나만 뒤처졌다는 증거”가 아니었다. 대신 “이 방식은 지금의 나에게 맞지 않는다”는 신호가 됐다. 실패가 나를 평가하는 도구가 아니라, 선택을 수정하는 정보가 된 것이다. 이 차이는 결정적이었다. 실패해도 나 자신을 부정하지 않게 되자, 시도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때부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중요한 건, 이 변화가 나를 곧바로 성공으로 이끌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여전히 불확실했고, 여전히 부족했고, 여전히 흔들렸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달라졌다. 이제 그 흔들림이 나를 무너뜨리지는 않았다. 왜 흔들리는지 설명할 수 있었고, 그 이유를 전부 나의 결함으로 돌리지 않아도 됐다. 그건 아주 큰 차이였다.
돌이켜보면, 성공담을 따라 하며 가장 크게 잃었던 건 시간이나 기회가 아니라 자기 신뢰였다. 내 감각을 믿지 못했고, 내 판단을 의심했고, 내 속도를 부끄러워했다. 맥락을 회복한다는 건, 바로 그 신뢰를 하나씩 되찾는 과정이었다. 남의 지도를 내려놓고, 비록 조악하더라도 내 지도를 다시 그리는 일이었다.
이제 나는 성공담을 전혀 보지 않게 된 건 아니다. 다만 그 성공담을 참고 자료로만 둔다. 저 사람은 저 조건에서 저 선택을 했다는 정보일 뿐, 내가 그대로 따라야 할 설계도는 아니다. 이 구분이 생긴 뒤로, 성공담은 나를 조급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아, 저런 길도 있구나” 정도의 거리감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이 글의 마지막에서 분명히 말하고 싶다.
성공담을 따라 하다 나만 뒤처졌다는 느낌이 들었다면, 그건 네가 잘못 살아서가 아니다. 그건 너의 맥락이 그 성공담 속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맥락을 무시한 채 달리는 건, 누구에게나 결국 한계로 돌아온다.
멈춰도 된다.
다르게 가도 된다.
남들보다 늦어 보여도, 그 길이 네 삶을 덜 망가뜨린다면 그게 맞다.
성공담을 따라 하다 멈춘 순간은 실패가 아니다.
그건 비로소 자기 삶의 속도를 되찾은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