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가 이미 넘어가 있었을 때
오늘은 성공한 사람의 버텨라 라는 조언이 나를 망가뜨렸던 이유에 대해 이야기 하러 합니다.

이미 충분히 버텨온 사람에게 던져진 말
나는 처음부터 무너져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 몇 달, 아니 몇 해 동안 나는 오히려 꽤 단단한 편이었다. 힘든 일이 생겨도 감당할 수 있다고 믿었고, 잘 안 풀리는 시기가 와도 “이 정도는 과정이지”라며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었다. 그 시기의 나는 아직 버팀이라는 말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버티는 건 지나가는 과정이고, 언젠가는 끝이 있는 상태라고 믿었다.
문제는 버팀이 어느 순간부터 선택이 아니라 기본값이 되었을 때 시작됐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이미 지쳐 있었고,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에 하루를 끝내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쉬는 날에도 완전히 쉬지 못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불안했고,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뒤처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아직은 버틸 수 있다고, 여기서 멈추는 건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시점에서 나는 이미 충분히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묻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늘 미래만 이야기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조금만 더 하면 뭐가 나올 것 같아?”
그 질문들 사이에는 내가 이미 지나온 시간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다. 몇 년 동안 같은 방향으로 밀어붙였고, 수없이 흔들렸으며, 수없이 포기 직전까지 갔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결과가 아직 없다는 이유로, 나는 늘 “조금 더 필요한 사람”으로만 취급되었다.
그때부터 주변에서는 자연스럽게 같은 말이 반복되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버텨봐.”
“여기까지 왔는데.”
“지금 그만두면 아깝잖아.”
그 말들은 대부분 이미 성공한 사람들의 입에서 나왔다. 그들은 실제로 그 시기를 통과했고, 지금은 비교적 안정된 위치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말은 경험에서 나온 말처럼 들렸고, 나는 쉽게 반박할 수 없었다. 그들은 늘 같은 방식으로 과거를 정리했다. “나도 그때 정말 힘들었어. 근데 버티니까 되더라.”
하지만 그 말 속에는 결정적인 공백이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그때’와, 내가 서 있던 ‘지금’은 같은 지점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직 회복 가능한 상태에서 버텼고, 나는 이미 회복을 미루다 한계를 넘어선 상태였다. 하지만 그 차이는 설명되지 않았다. 성공한 사람의 말은 언제나 하나의 결론으로 단순화되었다. 그러니까 너도 버텨야 한다는 결론.
그 말을 들을수록 나는 묘한 죄책감을 느꼈다.
내가 힘들다고 느끼는 건 아직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지쳐 있다고 말하는 순간, 지금까지의 모든 버팀이 부정당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점점 설명을 포기했다. 힘들다는 말을 줄였고, 대신 괜찮은 척을 늘렸다.
그때부터 나는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버티는 척을 했다.
괜찮은 사람처럼 말했고, 아직 여유가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계속 계산했다. 오늘은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지, 이번 주는 넘길 수 있을지. 삶을 계획하는 게 아니라, 붕괴를 지연시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버텨라”는 말은 점점 조언이 아니라 판결처럼 느껴졌다.
이미 충분히 버텨왔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앞으로 얼마나 더 견딜 수 있는지였다.
그렇게 나는 나의 과거를 스스로 지웠고, 현재의 상태를 무시한 채 미래의 결과만 바라보며 버티는 사람이 되어갔다.
버팀이 회복이 아니라 소진으로 바뀌는 순간
어느 순간부터 버틴다는 말이 전혀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이전의 버팀은 끝이 있는 과정처럼 느껴졌는데, 그 시기의 버팀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만 더”라는 말이 반복될수록 그 ‘조금’은 점점 늘어났다. 이번 달만, 이번 분기만, 이번 기회만. 그렇게 회복은 계속 미뤄졌고, 시간만 쌓였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 자체가 버거웠고, 사소한 일에도 쉽게 지쳤다. 집중력은 눈에 띄게 떨어졌고, 예전에는 자연스럽게 하던 결정 하나에도 과도한 에너지가 필요했다. 그래도 나는 이 모든 걸 과정 중의 불편함으로 해석하려 애썼다. 성공한 사람들도 다 겪었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마음은 이미 다른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의욕은 사라졌고, 기대는 줄어들었으며, 성취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하루를 돌아보면 남는 건 늘 같은 문장이었다. “오늘도 그냥 넘겼다.” 이 문장은 생각보다 위험했다. 더 나아진 것도, 회복된 것도 없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사실만 남겼기 때문이다.
그 상태가 며칠이 아니라 몇 달, 몇 년 이어졌을 때 나는 점점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유지되는 상태가 되어갔다.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최소한의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에너지를 쓰는 사람이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 버텼다.
버티지 않으면 모든 게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멈추면 그동안의 시간과 노력이 전부 실패로 확정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버팀을 선택한 게 아니라, 버팀 말고는 선택지가 없다고 믿게 되었다.
주변의 말들은 그 믿음을 더욱 굳혔다.
“다들 이 시기는 견뎌.”
“지금 포기하면 나중에 더 힘들어.”
“여기서 버티는 사람이 결국 살아남아.”
이 말들은 현실적인 조언처럼 들렸지만, 실제로는 나의 감각을 전부 지워버렸다. 내가 느끼는 피로와 불안은 과장된 것으로 취급되었고, 설명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점점 내 상태를 말하지 않게 되었고, 혼자서만 무너지는 연습을 하게 되었다.
그 시점에서 버팀은 더 이상 나를 단단하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텅 비게 만들었다.
감정을 느끼지 않으려 애썼고, 느껴도 바로 잘라냈다.
“이 정도로 힘들어하면 안 돼.”
“다들 이 정도는 견뎌.”
이 말들은 위로가 아니라 자기 검열이었다.
버팀은 어느새 성장의 과정이 아니라,
자기 감각을 포기하는 연습이 되어 있었다.
나를 살린 건 끝까지 버티라는 말이 아니라, 멈춰도 괜찮다는 인정
한계라는 단어가 더 이상 추상이 아니게 된 순간이 있었다.
몸과 마음이 동시에 신호를 보내고 있었고, 그 신호는 점점 더 분명해졌다. 이전처럼 “조금만 쉬면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로 넘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대로 가면 정말로 회복 불가능한 지점까지 갈지도 모른다는 감각이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멈추는 선택은 끝까지 미뤄졌다.
멈춘다는 건 실패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끝까지 버티지 못한 사람,
성공한 사람들의 조언을 증명하지 못한 사람으로 남을 것 같았다.
나는 여러 번 스스로와 협상했다.
“이것까지만 하고.”
“이번 결과만 보고.”
“조금만 더 정리하고.”
하지만 기준은 계속 뒤로 밀렸고, 나는 계속 한계를 넘고 있었다.
결국 나를 멈추게 만든 건 의지가 아니라 공포였다.
실패가 아니라, 회복 불가능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이대로 가면 다시는 예전 상태로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는 감각이었다.
멈추고 나서야 비로소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아무 방향도 정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 시간은 편안하지 않았다. 불안했고, 공허했고,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그 공허 속에서 내 감각은 서서히 돌아왔다.
피곤하다는 걸 인정했고,
무섭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냈고,
실패가 아프다는 사실을 더 이상 부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때 깨달았다.
나에게 필요했던 건 더 버티라는 말이 아니라,
이미 충분히 견뎌왔다는 확인이었다는 걸.
그 확인이 없었다면 나는 계속 버텼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회복이 아니라 붕괴에 도착했을 것이다.
이제 나는 누군가에게 쉽게 “버텨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이미 얼마나 오래 버텨왔는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 모른 채 던지는 말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순간에는, 버티지 않는 선택이 가장 정직한 선택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