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던 순간
오늘은 하면 된다 라는 말이 가장 무책임하게 들렸던 실패에 대해 이야기 하러 합니다.

가장 많이 들었고, 가장 쉽게 던져진 말
실패한 뒤, 가장 먼저 들었던 말은 거의 예외 없이 같았다.
“그래도 하면 되잖아.”
“조금만 더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의지 문제지, 결국은.”
이 말들은 언제나 빠르고, 가볍고, 준비되어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설명하기도 전에,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듯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그 말 속에는 질문이 없었다. 대신 확신만 있었다. 실패의 원인은 이미 규정되어 있고, 더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는 태도였다.
이 문장이 유독 힘든 이유는, 반박하기가 어렵다는 데 있다. “하면 된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상에는 그렇게 해서 해낸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들의 이야기는 어디에서나 증명처럼 인용된다. 그래서 이 말을 듣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다. ‘저 사람들은 했는데, 나는 왜 못했지?’라는 질문으로 사고가 흘러간다.
나 역시 그랬다. 처음에는 그 말을 거부하기보다 받아들였다. 실패의 원인을 환경이나 운, 구조 같은 외부 요인으로 돌리는 건 어쩐지 변명처럼 느껴졌다. 차라리 내 의지가 부족했다고 인정하는 편이 더 솔직하고 책임감 있어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직 희망도 남아 있었다. 의지는 다시 다질 수 있고, 마음은 다시 먹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다시 시작했다.
이전보다 더 철저하게 계획을 세웠고,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쉬는 시간은 줄였고, 감정이 흔들릴 틈을 주지 않으려 애썼다. 힘들다는 생각이 들면, ‘다들 이 정도는 견딘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포기하고 싶다는 감정은 의지가 약해졌다는 신호라고 해석했고, 그럴수록 더 강해져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노력의 양은 줄지 않았는데, 집중력은 눈에 띄게 떨어졌다. 해야 할 일을 앞에 두고도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날이 늘었고, 작은 실수에도 감정이 크게 요동쳤다. 결과가 나쁘면 ‘역시 의지가 부족해서 그래’라고 스스로를 몰아붙였고, 그 생각은 다시 더 많은 부담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하면 된다”는 말이 조금씩 다른 얼굴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 말은 더 이상 나를 일으켜 세우는 문장이 아니었다. 이미 충분히 애쓰고 있는 사람에게, 지금까지의 노력은 전부 무시한 채 결과만으로 판단하겠다는 선언처럼 들렸다. 과정은 중요하지 않고, 상태는 고려 대상이 아니며, 오직 결과만이 기준이라는 메시지였다.
나는 정말 안 했던 걸까?
정말 덜 간절했던 걸까?
아니면, 이 실패는 애초에 그렇게 단순한 문장으로 설명될 수 없는 종류였던 걸까?
이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기 시작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실패의 원인을 다른 각도에서 보기 시작했다.
의지가 부족했던 게 아니라, 이미 한계를 넘고 있었던 상태
사람들은 흔히 실패를 마지막 장면으로 기억한다. 끝내 해내지 못한 순간, 포기한 지점,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태만을 보고 판단한다. 그래서 실패의 원인도 늘 마지막에 있는 것처럼 말한다. 조금만 더 버텼으면, 조금만 더 참았으면, 마지막 한 고비만 넘었으면 달라졌을 거라고.
하지만 내가 겪은 실패는 마지막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문제는 그 이전, 너무 오래 버텨왔다는 사실에 있었다.
나는 이미 여러 번 한계를 넘긴 상태였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했고, 쉬어야 한다는 감각을 합리화로 덮었다. 힘들다는 감정은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고, 멈추고 싶다는 생각은 패배로 간주했다. 그렇게 한계를 한 번 넘기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어디까지가 정상인지조차 잘 느껴지지 않았다.
의지가 부족한 상태와 이미 소진된 상태는 겉으로 보면 비슷하다.
둘 다 멈춰 있고, 둘 다 성과가 없으며, 둘 다 실패라는 단어로 묶인다. 하지만 내부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의지가 부족한 사람은 쉬고 나면 다시 움직일 수 있다. 반면 이미 소진된 사람은 쉬어도 회복되지 않는다. 에너지가 충전되지 않는 상태에서 계속해서 출력을 요구받는 셈이다.
그 시기의 나는 명백히 후자였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피로가 느껴졌고, 해야 할 일을 떠올리면 가슴이 답답해졌다. 해야 할 이유는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시작할 힘이 없었다. 게으른 게 아니라, 이미 너무 오래 긴장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말은 늘 같았다.
“다들 힘들어.”
“원래 이 과정은 다 그래.”
“이 정도도 못 버티면 나중에 더 힘들어.”
이 말들은 공감처럼 들렸지만, 실제로는 나의 상태를 지워버렸다. 모두 힘들다는 말은, 결국 네가 느끼는 이 고통은 특별히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작동했다. 그렇게 나는 점점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었다.
‘왜 나는 이 정도도 못 견디지?’
‘다른 사람들은 다 하는데, 왜 나만 이렇게 힘들지?’
‘결국 내 의지가 약한 걸까?’
이 질문들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나를 더 깊은 자기비난으로 끌어당겼다. 실패의 원인을 전부 나의 성격과 태도로 돌리면서, 나는 점점 나 자신과 싸우게 되었다. 그 싸움은 끝이 없었고, 이길 수도 없었다. 이미 에너지가 바닥난 상태에서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일은, 회복이 아니라 소진을 가속시키는 일이었다.
그제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하면 된다”는 말이 무책임하게 들렸던 이유는, 그 말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 말은 아직 여력이 남아 있는 사람에게는 동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한계를 넘은 사람에게는, 그 말을 따를수록 더 깊이 망가질 뿐이었다.
나를 살린 건 더 강해지라는 말이 아니라, 멈춰도 된다는 허락
결국 나는 그 일을 끝내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끝까지 가지 않기로 선택했다. 더 밀어붙이면 정말로 회복할 수 없는 지점까지 갈 것 같다는 감각이 분명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 선택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만두는 순간, 그동안 들었던 모든 말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조금만 더 했으면 됐을 텐데.”
“여기서 포기하면 지금까지가 다 헛수고야.”
“의지만 있으면 되는 걸 왜 그만두냐.”
이 말들은 실제로 누군가가 하지 않아도, 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그만두는 선택은 곧 나약함을 인정하는 일처럼 느껴졌고, 실패를 확정 짓는 행위처럼 보였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망설였다. 하지만 동시에, 더 가면 안 된다는 감각도 분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멈추고 나서야 숨이 쉬어졌다.
실패라는 결과는 그대로였지만, 내 상태는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했다. 잠을 제대로 자기 시작했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에도 스스로를 비난하지 않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나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었는지, 멈추고 나서야 비로소 보였다.
돌이켜보면, 나를 살린 건 새로운 조언이 아니었다.
“다시 도전해라”도 아니었고,
“이번엔 다를 거다”도 아니었고,
“끝까지 가야 의미가 있다”도 아니었다.
나를 살린 건 아주 단순한 인식 하나였다.
이 실패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사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실패는 더 이상 나의 무능함이나 나약함을 증명하는 증거가 아니게 되었다. 실패는 여전히 실패였지만, 나라는 사람 전체를 부정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인식이 생기자, 다시 같은 방식으로 나 자신을 증명하려는 강박에서도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다.
성공한 사람들의 조언이 도움이 되지 않았던 이유도 이제는 분명해졌다. 그 조언들은 대부분 결과 이후의 시점에서 나온 말들이었다. 이미 다른 위치에 도달한 사람이, 과거의 과정을 단순화해서 정리한 말들이었다. 그 말들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모든 말에는 적용 가능한 시점과 대상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 실패를 통해 배웠다.
“하면 된다”는 말은 여전히 어딘가에서는 유효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어떤 순간에는 “하면 된다”보다
“지금은 멈춰도 된다”는 말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의지는 무한하지 않고, 사람의 상태는 늘 변한다. 실패를 무조건 의지의 문제로 환원하는 순간, 우리는 너무 많은 맥락을 놓친다. 그리고 그 맥락을 놓친 조언은, 아무리 선의라 해도 누군가에게는 가장 무책임한 말이 될 수 있다.
실패는 여전히 아프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그 실패를 이유로 나 자신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던 순간이 분명히 존재했음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